행복 클리닉 사연 담은 영화 나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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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중앙일보의 가정사 상담 대형 코너인 '행복 클리닉' 첫 회 '빗나가는 중3 딸'이 지면에 소개된 지난 1월23일. 독자 e-메일이 답지했고 (www.joins.com) 게시판엔 수십 건의 독자의견이 이어졌다.

가출을 일삼는 '중3 딸' 문제로 속썩고 있는 민정이(가명) 엄마의 애절한 사연에 공감한 독자 반응이었다. 가출 청소년 문제는 이 땅 많은 부모의 문제란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흔치 않은 제목의 e-메일 한 통이 눈에 띄었다. '청바지 때문에 가출했어요'. 사연은 제목보다 더 유별났다. 독립 영화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독자는 탈선 청소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하던 참에 본지 기사를 보게 됐다고 했다.

머리 염색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뛰쳐나간 민정이의 사연이 청바지 때문에 가출한 시나리오 상의 주인공 상황과 너무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석달 뒤. 영화가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다. 촬영 뿐만 아니라 편집 등 후반 작업까지 모두 마쳐 독립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목은 그대로 '청바지 때문에 가출했어요'.

독립영화사 'CA 엔터테인먼트(02-3216-7776)'의 대표 여태수(46)씨가 시나리오 및 연출 작업을 도맡았다. 그는 그동안 '인카네이션'(1997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96년) 등 연극을 제작.연출해 왔다.

영화는 하은이와 은하 두 여중생의 이야기다.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하은이 이야기는 '행복 클리닉'에 소개된 민정이의 사연을 그대로 본딴 것. 하은이가 가출하기까지의 상황이 민정이 얘기다.

머리를 염색하고 밤늦도록 인터넷 채팅을 즐기는 하은이. 딸의 행동이 영 못마땅한 아버지는 하은이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마구 때린다. 집을 뛰쳐나가 밤거리를 방황하는 하은이.

쇼윈도에서 형형색색의 컬러 염색을 한 애완견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개도 소도 다 하는데 왜 우린 안된다는 거야." 하은이는 결국 사창가로 흘러들어간다.

영화 후반부엔 새로운 주인공 은하의 탈선과 방황이 이어진다. 사소해 보이는 청바지가 부녀간 갈등의 단서로 작용한다.

'메이커' 청바지를 입고 싶은 딸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간의 갈등 구조는 청소년 문제가 생활 속의 작은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은하의 가출 →술집 생활 →윤락 →은하의 자살 '로 전개되는 영화는 끝내 아버지의 자살이란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여감독은 "이 시대 아버지에겐 자의식이 형성된 자식이라도 소유물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남아있다"며 "청소년 문제의 본질은 이렇듯 세대간의 부조화와 몰이해가 가장 큰 원인이란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화엔 10여 명의 성인.아역 배우가 등장한다. 성인 배우의 경우 모두 영화.연극 배우, 모델 등 전문 연기자이지만 여감독과의 친분 등으로 모두 '노 개런티(출연료 없음)'로 나왔다. 덕분에 제작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필름이 필요없는 디지털 영화라 제작비는 1백만원이 채 안들었다.

주인공 은하역의 김현경(15.인천 부광중 2년)양은 "학교 등 주위에서 너무 흔한 얘기라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며 "은하처럼 된다면 나같아도 자살을 결심했을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당초 70분짜리였던 영화는 지금 30분짜리로 재편집 작업 중이다. 독립 영화제 몇 군데에 출품해 놓긴 했지만 여감독은 이 영화가 청소년 문제 교육용으로 쓰이길 더 바란다.

여감독은 "일반인의 삶의 방식을 가감 없이 영상화할 때 사회성과 예술성은 더욱 빛이 난다"며 "이런 의미에서 중앙일보의 '행복 클리닉'코너가 다루는 주제를 앞으로 계속 영상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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