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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⑤여성] 42. 당당해진 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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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김추자는 딱 달라붙는 옷과 현란한 춤으로 도발을 감행했다. <중앙포토>

마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시렵니까?”
그렇게 말하는 신춘호의 눈에는 이상한 흥분이 넘쳐 있었다. 오선영 여사는 그 모양을 발견하자, 말초신경이 이상야릇하게 저려오는 것만 같았다.
- 소설『자유부인』중에서 -

# 자유부인, ‘딴스’에 빠지다

1954년 1월. 서울신문에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현숙한 가정주부가 연하의 대학생과 몸을 부비는 ‘딴스’에 빠지고, 외간남자와 성적 탈선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댄스야말로 민주혁명의 제일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자유부인은 ‘춤’이라는 외피를 통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을 대변했다.

개방적인 서양문물은 전후 재건 붐을 타고 쏟아져 들어와 집에 갇힌 여성들의 성욕을 자극하고 호기심을 유발했다. 이제까지 여성의 성은 출산과 관련되지 않고는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60~70년대를 거치면서 춤은 ‘춤바람’으로 번져갔다. 장바구니를 든 채 카바레로 향하는 풍경도 연출됐다. 66년 서울에는 46개의 카바레와 댄스홀이 있었다. 같은 시기 양식당 수는 54개, 호텔 수는 44개였다.

댄스홀의 자유는 곧 성적 타락과 동일시됐다. “연말연시 새벽에 댄스홀에서 수십 명의 동반자 없는 가정 부녀자를 즉결심판에 넘겼다”는 일제단속 기사는 당시 단골 뉴스였다.

#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

‘자유부인’이 히트치던 즈음, 박인수 사건이 일어났다. 55년 5월.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혐의로 검거된 박인수는 폭탄 증언을 한다. “내가 상대한 여성 중 순결한 여성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고. 법원도 인구에 회자된 판결문을 남긴다. “법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며 박인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인수는 혼인빙자간음죄를 적용받지 않았다.‘정조에 관한 죄’는 이후 90년대 여성단체들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할 때까지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 슬픈 누이 ‘양공주’와 ‘기생관광’

‘양공주’‘기생관광’이란 경멸적 단어는 한국 역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름이다. 여성들이 성적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성의 상품화가 가속되고 있었다.

66년 무렵 이태원ㆍ송탄 등 전국 62개 기지촌의 양공주는 3만 명을 넘었다. 일본인을 상대로 한 기생관광으로 78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은 700억원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 술집에 면세 혜택을 주고 관광기생에게는 통행금지와 상관없이 영업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했다. 국가가 앞장서 여성들을 성 산업으로 내몬 것이다. 양공주와 기생들은 ‘타락한 여자’이면서 ‘애국자’로 불렸지만 사회적으로 배척당했음은 물론이다.

# 여성의 이름으로 성을 말하다

69년 데뷔한 가수 김추자는 폭발적인 가창력 못지않게 섹시함으로 대중을 자극했다. 터질듯이 꼭 끼는 판탈롱 바지, 엉덩이를 쉴 새 없이 현란하게 돌려대는 춤은 파격 그 자체였다. 당시 한창 유행이던 미니스커트와 블루진을 입은 여성들도 ‘헤퍼 보인다’는 남성적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옷차림과 과감한 행동으로 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이름으로 성에 대해 학문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다. 대안적 문화동인 ‘또하나의 문화’가 『새로 쓰는 사랑이야기』 『새로 쓰는 결혼이야기 』 등의 책을 펴냈다. 97년 여름.‘여성의 욕망을 아는 잡지’를 표방한 잡지 ‘이프’가 발간됐다. ‘이프’는 여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ㆍ성ㆍ연애ㆍ소통과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99년 10월, 탤런트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는 책의 출간은 개인의 성생활을 적나라하게 공개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충격을 던졌다.

# 도발과 상품화의 이중주

2000년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의 활황을 기반으로 성은 폭주ㆍ범람의 시기를 맞았다. 각종 포털사이트엔 여성의 성에 대한 담론이 들끓는 반면,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한 포르노 동영상도 무차별로 쏟아지고 있다. 그 와중에 여자 연예인들의 성행위를 담은 비디오가 유출돼 남성의 관음증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2003년 8월. 이효리는 탱크톱과 배꼽티에 핫팬츠를 입고 온몸을 뇌쇄적으로 흔들며 단지 10분이면 너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10 minites’를 불렀다. 어서 다가와 나를 가질 수도 있지 않으냐는 육감적인 몸짓과 도발하는 눈빛 속엔 과거 피해자의 위치에 놓이거나 움츠러들었던 여성의 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폭행, 성희롱, 성접대, 몰래카메라, 여자 연예인 누드집 출간에서 부부 강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성과 관련된 사건들은 현재도 시대의 화두로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권혁란 ‘이프’ 편집위원

“사람마다 성 취향 다를 뿐… 변태가 어딨나”

▶ 서갑숙 탤런트.『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의 저자.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란 책은 21세기를 불과 두 달 앞두고 출간됐다. 그 때 내 나이 서른아홉. 마흔을 앞두고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성찰하고 싶었다. 현재의 나를 있게 한 갖가지 경험과 생각을 글로 표현했는데 그 중에서 성적인 부분들만 가려 뽑아 묶는 바람에 한 여자 연예인의 성체험 고백서로 알려지게 됐다.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엄청날 줄은 몰랐다. 제목엔 나도 동의했다. 포르노가 여성을 학대하고 엽기적으로 다루고 대상화한다고 하지만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다른 성적인 것에 변태가 어디 있고 정태가 어디 있는가? 내가 경험한 성적인 모든 것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려 했다.

책은 많이 팔렸지만 내가 원하는대로 표현되거나 이해받지 못해 속상했다. 이후 “성인 인터넷 방송국을 같이 하자” “성인 영화를 만들자”며 거액을 제시받기도 했다. 유명도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자는 의도가 빤해 모두 거절했다.

지난 6년 동안 삭발까지 했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는 나의 방패다. “다 큰 여자가 제 생각과 경험을 얘기한 것이 뭐가 어떠냐”며 나를 믿어 주셨다.

출간 이후 낙인이 찍혀 연애할 사람도 없다. 요즘은 마음 공부와 몸 단련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 그런 책을 낸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때 중앙일보
한강변 정인숙 피살사건

1970년 3월 17일 오후 11시쯤. 서울 강변도로에 세워진 코로나 승용차에서 미모의 여성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그녀의 이름은 정인숙. 26세의 나이였다. 경찰은 그녀의 오빠를 살해자로 지목했지만 세간의 추측은 난무했다. 평소 정씨가 공화당 고관과 가깝다는 사실을 밝혀 왔기 때문. 국무총리 정일권을 비롯, 수많은 권력자가 그녀의 애인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권력 상층부 주변에는 언제나 유명 요정 마담과 여자 연예인의 이름이 떠돌았다. 퇴직한 대통령의 숨겨진 딸이 뒤늦게 나타나기도 했다. 일상화한 외도 문화와 권력이 결합돼 만들어 낸 합작품이었다.
(사진은 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 1970년 3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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