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이 기업대출 앞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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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올 들어 부동산시장 과열로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하면서 처음으로 가계가 기업을 제치고 은행 돈의 최대 대출자로 떠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돈을 빌려 부동산에 투자해도 남을 만큼 저금리가 지속되면서 은행이 주로 부동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가계 대출에 집중한 결과다.

반면 대기업은 현금이 남아돌아 되레 은행 빚을 갚는 경우가 많고 중소기업은 신용 부족으로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예금은행의 대출(말잔 기준) 가운데 가계대출 잔액은 293조3777억원으로 기업대출 잔액 287조6445억원을 앞질렀다. 평잔기준으로도 가계대출 잔액(290조4904억원)은 기업대출 잔액(288조8247억원)을 추월해 올 들어선 어떤 기준으로 봐도 가계가 은행 돈의 최대 이용자로 떠오른 것이다.

이 같은 추월 현상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은 은행 빚을 줄이고 가계는 주택담보대출을 늘리면서 본격화됐다.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 예금은행의 대출 잔액 가운데 기업대출 잔액은 124조원으로 가계대출 잔액 51조원의 약 2.5배 수준을 나타냈다. 99년까지도 기업대출이 가계대출 규모를 두 배 이상 웃도는 현상이 지속됐으나 2000년 가계대출(111조원)이 기업대출(198조원)의 56% 수준까지 늘어났다. 이후 기업 대출은 증가세가 계속 둔화된 데 비해 가계대출은 매년 급증세를 보이면서 2003년 가계대출이 기업대출의 92%선까지 확대됐으며 지난해는 이 비율이 99%에 달한 데 이어 올해 6월 말 역전하게 됐다.

지난해 말 가계대출 잔액은 277조7050억원으로 기업대출 잔액(281조9315억원)과의 격차가 불과 4조원가량으로 좁혀졌다. 결국 올 상반기 기업대출이 5조7000억원 증가한 데 비해 가계대출은 무려 17조1000억원이나 늘어나면서 가계대출의 초과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왜 그런가=외환위기 이후 많은 대기업이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상장기업의 부채비율이 100% 수준으로 낮아져 우량한 재무구조를 갖추게 됐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위축된 것도 은행에 대한 기업대출 수요를 위축시키고 있다. 특히 제조업은 지난해 말 현재 66조원의 현금을 보유할 만큼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기업들은 6월에도 1조2815억원의 은행 빚을 갚았다.

반면 가계는 올 들어 7월까지 주택담보대출로만 13조원에 달하는 은행 빚을 냈다. 여기에는 외환위기 이후 진출한 외국계 은행들이 가계를 상대로 소매금융에 치중하면서 국내 은행들도 대출 경쟁에 무차별적으로 뛰어든 영향도 큰 것으로 분석된다.

한은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 기업대출의 부실화로 고전한 은행들이 대출금을 떼일 염려가 없는 가계대출의 비중을 계속 높인 결과"라며 "기업들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서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여 은행 돈의 가계 쏠림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동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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