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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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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용서는 아름답다. 클론의 강원래가 자신을 휠체어에 앉힌 가해자에게 "죄책감 갖지 말라"고 말한 것은 아름답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용서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아름다운 서정시를 읊었던 독일시인 하이네의 입에서 "물론 적을 용서해야 한다. 그들이 목 매달린 다음에…"라는 극언이 나올 정도다.

반면 사면(赦免)은 쉽다. 일 년에 몇 번씩, 한번에 수백만 명에게 한다. 사면은 아름답지 않다. 사(赦)자는 원래 붉을 적(赤)과 채찍질할 복()으로 이뤄진 것이다. 피가 흐를 정도로 때려준 뒤 용서하는 게 사면이란 말이다. 죗값이 모자라는 사면이 있다면 다른 의도가 끼어든 것이다. 사면은 불순해지고 추악해진다. 예부터 그 남용을 경계해온 이유다.

18세기 이탈리아의 계몽사상가 체사레 베카리아는 당시의 전제적 형사재판을 꾸짖고 죄형법정주의를 역설했다. 그래서 근대 형법학의 선구자로 불린다. 고문과 사형제도 폐지라는 인도주의적 형법 이론을 펼쳤다. 그런 그에게도 사면은 "군주의 자의적 권력 남용으로서 '폭정'이라는 동전의 반대쪽 면"일 뿐이었다.

동양의 현자들은 그보다 훨씬 앞서 사면의 폐해를 꿰뚫었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 관중(管仲)은 "사면은 이익이 작고 해악이 커서 오래되면 그 해악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고대 중국의 성군 중 한 사람인 탕(湯) 임금은 포악무도한 걸왕을 징벌하러 가면서 "죄지은 자를 감히 사면하지 않겠습니다(有罪不敢赦)"라고 하늘에 맹세한다. 유교경전 주례(周禮)가 규정한 사면 대상은 여덟 살이 안 된 죄수, 여든 살이 넘은 죄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죄수 셋뿐이었다. 모두 무분별한 사면으로 법정신이 흔들리고 사회정의가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광복 60주년을 맞은 특별대사면으로 많은 사람이 은사를 입었다. 예치(禮治)시대의 산물인 사면이 오히려 법치시대에서 더 활약하고 있는 느낌이다. 혜택을 본 사람들이 다음 선거에서 표로 고마움을 표시할지는 모르지만 법치주의 원칙은 또 한번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근본적 치유가 간절한 때다. 법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사회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