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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자칭 보통사람 정명훈 “천재 못 따라가니 평생 노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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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호 26면

정명훈씨가 프랑스 프로방스 자택 정원에서 셋째 아들 민씨(지휘자)와 지난 2월 태어난 손자 준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식탁에는 풋고추와 어린 홍당무 등이 놓여 있다. [사진 정명훈]

2011년 정부 주최 신년음악회가 1월 4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다.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이던 나는 이 행사를 진두지휘했다. 3부 요인이 참석하는 신년인사회까지 겹쳐 연말연시 내내 비상근무였다.

<16> 국가대표 마에스트로

이날 오후 현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공연을 맡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정명훈씨가 급히 만나자는 것이었다. 무대를 가로질러 가다 한옥 창호를 형상화한 외벽 세트 장치가 눈에 띄었다. ‘예쁘긴 한데 오케스트라 음향이 어떨지….’ 순간 걱정이 스쳤다. 오페라와 달리 콘서트 무대의 경우 가급적 설치물을 피한다. 소리의 공명(共鳴)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휘자 대기실에 가보니 정씨와 이날 총연출을 맡은 국립오페라단 관계자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찍 리허설을 마친 정씨는 호랑이 눈을 뜨고 외벽 세트의 철거를 요구했다.

“내가 그동안 시향의 실력을 1년에 1%씩 올렸다면 오늘 저 벽 때문에 3%가 날아갑니다.”

그러나 오페라단 측은 “대통령 행사인데 지금 와서 철거할 시간이 없다. 그냥 하자”고 우겼다.

결국 내가 결론을 내려야 했다. 시각이냐, 청각이냐?

‘오늘 행사는 음악회다. 그렇다면 지휘자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 그만큼 음향에 민감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간 뒤면 청중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더구나 오늘은 대통령을 비롯해 우리나라 VIP들이 총출동하는 날이다. 나는 청각을 택했다. 현장 관계자를 쳐다보았다.

“30분 내 철거 가능합니까?”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철거하세요.”
“아니, 이 시간에 저거 부수다 엉망이 돼 버리면….”

만류하는 관계자를 나는 냉정하게 외면했다.

신년 첫 대형 대통령 행사다 보니 경황이 없었다. 곳곳에서 경호와 의전 간 마찰이 빚어지는 상황에서 나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손님 입장에서 독려했다.

오후 7시 콘서트홀 리허설룸에서 신년인사회가 시작됐다. 7시 30분쯤 정씨가 또 다시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8시 음악회 개막을 30분 앞두고서였다.

“오늘 마지막 곡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인데 독일어 가사를 한국말로 옮긴 스크린 자막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공연할 때 서서히 내려주면 관중이 의미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왜 진작 요청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준비하다 혹 실수라도 한다면….”

“과거에도 이런 요청을 했는데 안 들어주더군요. 비서관님이면 들어주실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순간 그의 간절한 눈빛이 보였다. 즉시 예술의전당 관계자를 불렀다.

“30분 내 되겠습니까?”
“네, 해보겠습니다.”

정명훈씨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중 4악장 ‘환희의 송가’를 지휘하는 모습. 무대 위로 한글 가사가 적힌 스크린 자막이 보인다.

오후 8시 애국가를 필두로 서울시향의 신년음악회가 시작됐다.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9번, 베르디와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가 이어지고 드디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환희의 송가)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에서 무대 위로 서서히 내려오는 자막.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 다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가사를 보면서 사람들은 더욱 감동했고 피날레는 멋있게 장식됐다. 앙코르로 ‘아리랑’이 나오고 모두가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서둘러 무대 뒤로 달려갔다. 대통령과 출연진의 뒤풀이 때문이었다. 정씨는 나를 보고 함박웃음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마쳤습니다.”

“결혼은 내 인생 최고의 행운”
내가 정명훈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봄이었다. 서울시향 예술감독으로 막 취임한 정씨와의 인터뷰를 위해 4월 말 도쿄로 향했다. 3박4일간 도쿄와 유명한 산악 휴양지인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輕井澤)를 오가며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정명훈씨는 피아니스트로서 21세(1974년)에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2등을 차지했고, 지휘자로서 36세(1989년)에 ‘프랑스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돼 세계적 음악가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만나 보니 의외로 자신을 낮추고 있었다.

“나 정도 재주를 가진 사람은 많습니다. 천재들이 한 발자국씩 성큼성큼 딛고 나간다면 나는 굉장히 오래 걸려서 그 뒤를 쫓아갑니다.”

그에게는 뉴욕 필하모닉의 전설적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1918~90) 같은 이가 천재다.

“나는 지휘 하나도 벅찬데 그분은 지휘뿐 아니라 피아니스트에 작곡까지 합니다. 죽어라 하고 연습해야 간신히 따라갑니다.”

그는 ‘노력파’였다. 잠시도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우고, 인터뷰는 리허설 도중 휴식시간이나 달리는 열차 안에서 했다.

어렸을 적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피아노 음 하나 틀리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였다. 늘 도달하기 어려운 아주 높은 목표를 잡고 연주하면서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을 만큼 자신을 혹독하게 다뤘다.

그러나 20대 들어 지휘자로 전향, 자신보다 오케스트라 전체를 생각하며 어둡고 고독한 음악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 결혼이 더해지면서 그의 인생은 날개를 달았다. 정씨의 부인은 다섯 살 연상의 구순열씨로 원래 사돈 간이었다.

“결혼은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며 내 인생을 180도 바꿔 놓았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모두 네 번의 ‘기적’이 있었는데, 아내와의 결혼과 세 아들을 낳았을 때라고 말했다(세상에!).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그는 자신을 재발견했다. 가족의 ‘조수’ ‘심부름꾼’ 역할을 하면서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났고, 살아가는 즐거움을 발견했다.

항상 “더 잘할 거야” 격려한 어머니
정명훈씨와 그때 만난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서울시향은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적어도 아시아에선 일본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휘자 정씨의 능력과 카리스마가 큰 몫을 차지한다.

그는 ‘독불장군의 전형’이란 비판도 듣는다. 정·재계 실력자들과의 교분이나 사교활동을 좋아하지 않으며, 학연·지연 등 인맥이나 정치적 고려도 배제한다.

그러나 단원 대부분은 그가 오로지 음악의 완성도에만 집중한다는 사실을 안다. 항상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야 한다”며 매섭게 채찍질하는 것이 어떤 이해관계나 사심(私心)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

정명훈씨의 ‘긍정적 압박(positive pressure)’은 어머니 이원숙씨(작고) 가르침의 소산이다. 그녀는 평생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왜 못하느냐”고 질책하지 않았다. 늘 “더 잘할거야”라고 격려했다.

단원들은 정씨의 지시가 “단순·명확하다”고 말한다. 정씨도 동의한다. “내 일은 호텔 포터(porter·짐꾼)와 비슷합니다. 그의 임무는 단순·명확하죠. 내 짐을 들고 방까지 잘 옮겨주는 겁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죠.”

정명훈씨의 시간 관리는 유명하다. 서울시향에 나올 때는 아침 8시 전 일찍 출근해 먼저 피아노를 친다. 리허설 시간 외 중간 빈 시간에도 피아노를 치거나 악보를 본다. 농담이나 한담도 별로 없다.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의 스케줄을 담당하는 직원은 “거의 분(分) 단위로 시간을 쓴다”고 했다. 마치 바쁜 사업가처럼 자동차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보고를 받거나 사무를 처리한다. 외국 갔다 새벽 비행기로 돌아오면 바로 스케줄로 이어진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가.

“천재들은 어마어마한 재주가 있어요. 내가 100번쯤 봐야 외울 수 있는 악보를 단 몇 분 안에 해치웁니다. 이러니 평생 노력할 수밖에 없죠.”

“순수해지려면 단순해져야 합니다”
그의 바깥 삶이 ‘알레그로(allegro·빠르게)’라면 안쪽 삶은 그야말로 ‘안단테(andante·느리게)’다. 퇴근하면 보통 집으로 쏜살같이 간다. VIP나 대기업 회장이 저녁 먹자고 해도 대부분 사절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취미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집에서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쉬는 것이다.

음악 외에 가장 좋아하는 일이 요리다. 연주가 끝난 후 늦은 저녁 집으로 달려와 부엌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면서 이것저것을 요리해 식구들과 둘러앉아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다(그는 요리책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Dinner for 8』을 펴내기도 했다).

휴일이나 휴가 때도 거창한 것이 없다. “집에서의 일과는 그 이상 심플할 수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 공부하고 아침 먹고…, 다시 한 시간 정도 걷다가 또 공부하고, 다시 점심 해먹고 걷다가 공부하죠. 그게 행복해요.”

그는 1년을 삼등분해 한국과 프랑스에서 머물거나 외국 순회공연으로 보낸다. 프랑스 남 프로방스 집에 있을 때는 농사를 짓는다. 덕분에 선탠한 사람처럼 얼굴이 그을려져 있다.

스스로 표현은 잘 안 하지만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언젠가 그는 “살아오면서 항상 보이지 않는 손과 힘에 끌려오는 삶을 지냈다”고 토로했다.

그는 세계적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을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로 꼽았다. “줄리니는 성직자 같고 메시앙은 성인 같은 분입니다. 그분들같이 겸손해지겠다는 것, 그것이 내 인생 목표입니다.”

그 겸손함이 음악으로 연결시킨다면 ‘순수함’이라고 했다. “순수하려면 단순해져야 합니다.”

종합해볼 때 정명훈씨의 삶의 키 워드는 ‘단순함’이었다. 이 복잡한 시대, 너도나도 빨리빨리 쫓고 쫓기며 온갖 에너지를 소모해 버리는 ‘번아웃(Burnout·탈진증후군)’ 세상에서 그는 자신을 지키는 비법으로 ‘단순한 삶(Simple Life)’을 택했다.

평소 그렇게 바쁘게 살지만 그는 휴대전화도, e메일도 이용하지 않는 전형적인 ‘아날로그 맨’이다. 외국에 있는 그와 연락하려면 호텔로 국제전화를 걸거나 팩스를 보내야 한다.

그의 일상은 음악 외에 가족·요리·신앙이 전부다. 그러나 그는 현명하다. ‘단순한 삶’이야말로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사람을 접해 본 나로서는 인물이 두 부류로 나뉜다. ‘뛰어난 사람’과 ‘생각나는 사람’이다. 정명훈씨는 후자다. 그를 만나고 난 뒤 내면에서 잊고 지내던 명징함·투명함, 그리고 순수한 삶의 자세가 떠올랐다.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을 거쳐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부위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를 지냈다. 저서로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오른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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