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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좌절 아는 인간적 오네긴 느껴보세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03호 06면

“20대에 이미 2065명의 여성을 농락했고 하인을 시켜 그 여성들의 신상명세를 카탈로그로 만들게 한 호색한 돈 조반니. 신분·돈·외모·지성 등 모든 것을 갖춘 이 매력적인 인물을 바리톤 공병우는 잘 다듬어진 발성과 민첩하고 정교한 발음으로 완성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입은 듯한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가창은 기중기 위에서 바람처럼 빠른 템포로 ‘포도주의 노래’(Finch’han dal vino)를 부를 때나 거대한 사과 위에 위태롭게 버티고 선 채 기사장과 대결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여유와 기품을 잃지 않았다. 이보다 더 뛰어난 돈 조반니를 만날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주연 맡은 공병우

지난 3월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오페라단의 ‘돈 조반니’를 보고 쓴 리뷰의 일부다. 당시 이 공연을 보면서 문득, 돈 조반니 역을 맡은 바리톤 공병우가 차이콥스키의 오네긴 역도 아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오페라 속 두 인물은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오네긴을 경험할 기회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 12월 6일 오후 7시 ‘예브게니 오네긴’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2008년 국립오페라단의 ‘오네긴’도 같은 장소에서 이번처럼 ‘오페라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오케스트라가 피트 아닌 무대 위에서 연주하고, 무대장치와 의상과 연기 없이 성악과 관현악에 포커스를 맞추는 공연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성악가들이 무대의상을 갖춰 입고 연기를 보여주며, 조명을 다채롭게 사용해 실제 오페라 공연 같은 분위기를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샤오치아 뤼 지휘, 제임스 로빈슨 연출로, 오네긴 역의 공병우 외에 타치아나 역의 소프라노 이윤아, 렌스키 역의 테너 파볼 브레슬릭 등 탁월한 가수들이 큰 기대를 모은다. 조역 가수들 역시 알차게 꾸려졌고, 유명한 왈츠와 폴로네즈를 포함해 차이콥스키의 화려하면서도 가슴 시린 음악을 연주할 서울시향에게도 기대가 크다.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난 바리톤 공병우는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국립오페라학교 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한 뒤 마르세이유 국립음악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벨베데레 국제콩쿠르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지만, 특히 2007년 서울국제성악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정제된 가창과 타고난 미성으로 크게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스페인·독일·노르웨이 등 유럽 유수의 극장에서 오페라 주역을 노래했고, 특히 돈 조반니 역으로 현지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최근 국내에서는 국립오페라단 ‘돈 카를로’의 로드리고 역으로 관객을 매혹했고, 정명훈이 지휘한 오랑주 페스티벌 ‘라 보엠’에서는 마르첼로 역으로 활약했다.

오네긴을 어떤 인물로 보여줄 것인지 공병우의 해석이 궁금해 물어보았다. 타치아나의 열정적인 사랑 고백을 거절할 때의 오네긴이 거짓말로 빠져나가려는 ‘나쁜 남자’인지 아니면 자신의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진지한 남자인지.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었다면 타치아나를 아내로 택했을 것’이라는 오네긴의 말은 진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몇 년 후 깊은 회한을 안고 재회했을 때 더욱 강렬하게 타치아나에게 빠져들었겠지요. 돈 조반니는 신적인 파워를 가진 인물이지만 오네긴은 후회와 좌절을 아는 훨씬 인간적인 인물로 그릴 생각입니다.”

모음보다 자음이 강조되는 러시아어를 노래하면서 소리가 깊어지고 무거워진다는 그는 앞으로 ‘오텔로’의 이아고 같은 개성 있는 악역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밝혔다.

글 이용숙 음악평론가 rosina@chol.com,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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