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독일은 원칙, 한국은 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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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베를린의 슈타지(옛 동독 비밀정보기관) 문서관리청 관계자들은 한국인들로부터 걸려온 느닷없는 전화 때문에 분주했다고 한다. 한 담당자는 "직접 찾아와 똑같은 질문을 하고 간 한국인들도 여럿 있었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한다. 왜 독일 국민이 궁금해 할 슈타지 비밀문서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지, 또 슈타지 문서 특별법의 내용과 입법 과정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정을 비교적 잘 안다는 한 간부는 사견을 전제로 "불법 도청 문제를 대하는 독일인과 한국인의 태도는 좀 다른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독일인들은 불법 도청행위 자체를 주로 문제삼은 데 비해 한국인들은 불법으로 입수한 비밀 정보의 내용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고 나름대로 풀이했다.

또 그는 "독일은 2년간 각계의 토론과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비밀문서의 처리 방향을 정했는데 한국은 너무 서두르는 것 같다"며 "독일은 원칙에, 한국은 속도에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역시 비밀문서 내용에서 일부 드러난 저명인사들의 범죄 혐의 때문에 여론이 들끓었다"며 "최근까지 공개 여부를 놓고 법정공방이 이어졌다"고 소개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헬무트 콜 전 총리에 관한 슈타지 문서다. 문서관리청이 공개를 거부하자 시민단체와 언론사들은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보도 자유'를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콜의 불법 비자금 조성 혐의 등에 대해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단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지난해 연방 행정법원은 도청 문건에 대해 '공개 불가' 판결을 내렸다.

문서관리청의 한 법률 전문가는 "법원의 판결은 지극히 상식적"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한 헌법 정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불법을 규명하기 위해 불법 행위를 인정한다면 법치의 의미가 무색해지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유권하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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