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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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예전에 그 숲 속에서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환청이 아니라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남녀가 약을 먹고 눈 속에서 죽었다는데 소주병과 약이 나왔다고 한다. 남자는 여자의 몸 위에 외투와 상의며 옷가지를 모두 덮어 주었더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가장 음울한 겨울이었다.

눈이 강산처럼 내린 날 아침이었다. 그날따라 최민기와 친구들 세 명이 우이동 골짜기의 내 거처를 찾아와 아내를 아랫목에 재운 채로 앉아서 소주를 좋이 열 병쯤 마시고 새벽녘에 쪼그리고 잠깐 잠들었던 참이었다.

-여기 나와 보셔요. 얼른 나오라니까….

아랫집 무당 여자가 호들갑을 떨어서 아내와 내가 먼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두리번거리는 우리에게 여자가 눈이 덮인 집 주위를 손가락질 해 보이면서 외쳤다.

-이게, 이게 바로 산신님 다녀가신 흔적이라구.

그야말로 어른 손바닥 만한 크기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소동에 놀란 친구들도 나와서 우리와 함께 두리번거렸다. 발자국은 정말 집 주위를 빙 돌아서 위 편의 등성이를 향하여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승의 발자국은 틀림없는 거 같은데….

-그게 개인지 늑대인지 무슨 산짐승인지 어떻게 알아.

애써 무시하려는 내 말에 최민기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개 발자국치곤 제법 크단 말야. 그리고 그게 한 줄로 찍혀 있잖아?

-한 줄로 찍히다니….

-고양이과 동물은 걸을 때 두 발을 모아서 차례로 딛거든.

하여튼 그렇다면 큰 고양이과 동물이 인가를 찾아서 맴돌다 갔다는 얘기가 되는데 무당의 산신에 관한 얘기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우리가 봄이 되어 그 골짜기를 떠난 뒤에 화가 여운이 소개하여 지금은 작고한 김기동이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혼자 그림을 그리며 살았는데 그에게는 더욱 구체적인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집에서 김 화백이 날마다 악몽에 시달린 것도 있었지만, 우리가 살던 집에서 반대편 골짜기로 내려가면 다른 줄기의 개천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큰 바위들이 둘러싼 넓은 웅덩이가 있었다. 나도 그쪽으로 내려가 식수를 바케츠에 길어다 먹었던 것이다. 계곡물이 작은 폭포처럼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 아래 너른 반석이 병풍처럼 둘려 있고 옴팍해서 사람 두엇이 들어가 앉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쌀이나 과일 따위며 타다만 동강이 초가 남아 있곤 했다. 누군가 와서 밤 새워 치성을 드리다 간 게 틀림없었다. 김씨가 취사 거리를 들고 와서 채소며 감자도 깎고 쌀도 씻어서 옆에 놓고 하다 보면 어느 틈에 그것들이 사라져 버리곤 했다. 나중에 그 골짜기가 경기도 일대의 무속인들이 들어와 신당을 짓고 굿과 치성을 드리는 장소로 변했는데 치성 장소에서 음식물들이 없어지는 것을 실물(失物)이라고 하여 민속 자료에 나오는 현상이다. 그곳에서 내려와 훨씬 아래쪽의 마을에 있는 집에 방 두 칸을 얻었고 여기서 장남 호준(皓準)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이듬해의 일이지만 나는 정석종 교수를 만나 장길산(張吉山)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된다. 장길산을 집필하던 십 년 동안에 내가 겪었던 기묘한 일들은 나중에 몰아서 쓸 작정이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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