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2·96·97년 … 선거 치른 해 예산 '껑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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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예비비 중 비밀활동비(국가정보원 관련 예산) 총액을 공개하세요. 그래야 깎든 늘리든 할 게 아닙니까."(한나라당 이한구 의원)

"비밀활동비는 국정원이 편성해 집행하기 때문에 우리도 총액을 알 수 없습니다."(전윤철 당시 기획예산처 장관)

2000년 12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회의장에선 국정원 예산을 둘러싸고 공방이 벌어졌다. 국정원법에 따르면 국정원 예산은 본예산(경상비 등 기관 자체 예산)과 비밀활동비로 구성된다. 비밀활동비란 기획예산처 예비비에 포함된 '국가안전보장활동비'와 일부 정부 부처의 '특수활동비'에 숨겨져 있다. 이 때문에 예산 주무 부처 장관이 총액조차 모르는 게 국정원 예산의 실체였다.

국정원 예산은 구체적인 사용 내역은 고사하고 총액이 정확히 공개된 적도 없다. 국회 예산 심의 때 파악되는 본예산과 예산 부처의 예비비에 대한 결산 심사 때 드러나는 비밀활동비의 규모를 합쳐 추정할 뿐이다.

국정원 본예산과 국가안전보장활동비를 합친 예산 총액은 중앙정보부 시절인 1980년 979억원에서 지난해 7144억원으로 일곱 배 이상으로 늘었다. 특히 본예산의 경우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등 전국 선거가 있을 때엔 적게는 10%, 많게는 두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드러났다. 본지 취재팀이 국회 예결산정보시스템을 통해 80년부터 2004년까지 25년간 국정원의 예산을 살펴본 결과다.

대선이 치러진 87년 예산 총액은 1759억4400만원으로 전년보다 26% 늘어났다.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진 92년(예산 4926억5900만원)에는 증가폭이 42%에 달했다. 96년(총선)과 97년(대선)때도 13.6%, 14.5%씩 뛰었다. 특히 국정원 예산 가운데 비밀활동비는 선거가 있는 해마다 크게 오른 것으로 나타나 일부 의원은 선거자금으로 유입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 비밀활동비는 92년 17.5%, 96년 11.3%, 97년 12.6%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관련, 97년 대선 직전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이 안기부 직원 200여 명에게 여비까지 주며 한나라당 후보의 지원 운동을 벌이도록 지시한 사실이 드러난 적도 있다.

◆ 국정원 예산, 지금은 1조원?=선거가 있는 해를 중심으로 가파르게 상승해 온 국정원 예산은 지금은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본지가 전.현직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국정원 예산은 인건비.판공비 등 경상비와 정보수집비, 장비구입.운영비, 사업비 등으로 구성된다.

감청 부서인 과학보안국장을 지낸 A씨는 "과학보안국이 전체 국정원 예산의 절반가량을 사용한다"고 전했다. 국회 정보위원을 지냈던 한 의원은 "감청 장비의 구입.운영비가 인건비 등 경상비(약 55%)를 제외한 나머지 정보활동예산 중 비중이 가장 크다"고 했다.

한나라당 권오을 의원은 "수백억원에서 1000억원에 이르는 국방부의 군사정보비나 경찰청 특수활동비 등 다른 부처의 비밀활동비까지 포함하면 국정원이 국민 몰래 쓸 수 있는 돈은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거 때마다 국정원 예산에 숨어 있는 예비비가 대폭 늘어왔지만 사용처를 캐낼 길이 없다"며 "그나마 16대 총선이 치러진 2000년 예결위에서 지출 근거가 불명확한 예비비 2300억원을 삭감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 "국정원 감시,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국정원이 국민 세금을 이용해 불법 도.감청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외부의 감시에서 벗어나 예산을 제멋대로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정원의 예산을 유일하게 들여다 보는 기관인 국회 정보위의 견제 기능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국정원 예산은 정부 예산회계법상 독립기관으로 분류돼 감사원의 예산 집행 감사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휴대전화 도청 의혹을 제기했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1999~2000년 장비 구입비 항목이 대폭 늘어 도청 장비를 들여온 게 아닌가 의심했으나 구체적인 내역이 보고되지 않아 캐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가 국정원을 다루는 수준은 한마디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고 토로했다.

국정원의 감청 장비 보유 현황을 국회에 보고토록 한 통신비밀보호법이 시행된 2002년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본지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국정원은 올 1월 현재 19종 156점의 감청 장비를 보유 중이라고 국회에 보고했다. 그러나 '무선 송신형 대화 녹음 장비''유선형 대화 녹음 장비' 등 추상적인 명칭으로 개략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어 첨단 도청 장비 도입 여부 등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은 "정보위에서 감청 장비 가격을 물으면 '기밀'이라는 답만 돌아온다"고 주장했다.

탐사기획팀=정용환.김성탁.정효식.임미진 기자

정보위 의원들 생각은
"갑자기 늘어난 예산항목 반드시 국회서 감사해야"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전.현직 의원들은 국가정보원 예산의 실질 감사 필요성을 집중 제기하고 있다. 적어도 갑자기 증가한 예산 항목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회 감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은 "총액 기준으로 하는 예.결산 심의로는 늘고 줄어드는 흐름 밖에 잡히지 않는다"며 "큰 항목별로 돈의 규모를 밝히고 특정 항목의 변화가 클 때는 세부적인 사용 내역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열린우리당 장영달 의원은 "그동안 정보위의 예산.업무 감독이 너무 느슨했다"며 "국가기밀 보호와 철저한 예.결산 검증은 양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4, 15대 국회 정보위원이었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지금처럼 사용된 예산 내역에 대해 질문하면'기밀이라서 알려줄 수 없다'고 답변하는 식으로는 이번 도청사건 같은 불법 예산 전용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보위원들의 보안 의식이 더 투철해야 철저한 예산 감시가 이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열린우리당 정의용 의원은 "두루뭉술한 국정원 예산항목이 좀 더 세부적으로 바뀌려면 위원들이 본 국정원 자료에 대해 비밀을 지킨다는 신뢰가 쌓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질 건 따지기 위해서라도 정보위원들은 어떤 경우라도 정치적 의도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윤리적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예 국정원의 기능을 축소하거나 국내 분야를 폐지하자는 의견도 많았다.

한나라당 권영세 의원은 "국정원의 국내 분야를 완전히 해체하거나 국정원에서 떼어내 별도의 기관으로 만드는 방법도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같은 당 홍준표 의원도 "국내 정보 분야는 모두 경찰에 넘기고 도.감청 장비는 모두 기무사령부에 보내 기무사의 대공 업무를 전문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는 "국내 기능을 존속시킬지를 계속 검토하고 해외.경제.과학기술 분야를 강화시키는 게 국정원 개편의 방향"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정보기관 개편은 신중하게 논의돼야 할 사안"이라며 "불행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점진적으로 무리없게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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