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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도청행위 수사와 도청내용 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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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5일 국가정보원이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불법 감청을 저지른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이른바 '안기부 X파일'로 촉발된 정보기관의 도청 사건 수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검찰이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2000년 8월 이후의 도청 행위뿐만 아니라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자행된 모든 도청 행위에 대해 수사하기로 한 것은 형평성과 진상 규명 차원에서 긍정적이다.

▶ 박종보 한양대 교수.헌법학

이제 검찰은 도청을 지시한 자와 그 내용을 보고받은 자를 철저히 밝히고 2002년 3월 이후 도청을 하지 않았다는 국정원 해명의 진실성도 파헤쳐야 한다. 법원은 공권력을 남용하여 국민을 사찰 대상으로 삼아 온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준엄하게 심판해야 한다. 국회는 도청 사실을 부인하고 기술적 불가능성마저 주장한 자들을 위증혐의로 고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불법 감청 녹음 테이프의 내용을 수사하는 것이나 이를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도청 행위 수사나 재발 방지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먼저, 도청 내용을 근거로 수사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주된 논거는 위법수집증거배제의 원칙이다. 위법한 수사로 얻은 증거는 법정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이 원칙은 1914년 미국연방대법원이 위법수집증거를 반환하도록 명한 윅스(Weeks) 판결에서 처음 선언되었다. 이 원칙은 61년 영장 없는 가택수색으로 압수한 음란물의 증거 능력을 부인한 맵(Mapp) 사건에서 주 차원까지 확대되었다. 그 핵심 목적은 손해배상이나 징계 또는 형사처벌만으로는 근절할 수 없는 위법한 수색과 압수를 억제하는 것이고, 그 근거는 헌법상의 프라이버시권이다. 우리 통신비밀보호법은 이 원칙을 채택하여 "불법 감청 내용을 재판 또는 징계 절차에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미국에서도 찬반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억제 효과를 기준 삼아 많은 예외가 인정된다. 예컨대 재판에서 사실을 입증하는 데 위법수집증거를 사용할 수 없지만, 피고인의 진술을 반박하거나 위증죄를 처벌하는 데에는 사용할 수 있다. 검찰이 위법수집증거에 근거하여 기소하는 것도 가능하고, 수사의 단서로 삼는 것도 허용된다. 불법 감청 내용을 근거로 법원이 수색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허용된다는 주 법원 판례도 있다. 그러므로 검찰이 도청 내용을 수사할 수 없다거나 특별법을 제정해야 가능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미국법을 인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편 국민의 알 권리를 이유로 도청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헌법이 보호하는 알 권리는 언론기관 등 일반적인 정보원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당하지 않는 권리와 자기에게 정당한 이해관계 있는 정보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지만 정부가 보유한 모든 정보의 공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니다. 반면에 헌법이 보장하는 사생활의 비밀은 사적 대화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그러므로 무턱대고 수사기관이 나서서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가기관더러 위헌적인 행위를 하라고 촉구하는 셈이다. 예외적으로 개인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공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를 상정할 수 있겠지만, 국가기관이 도청으로 얻은 대화 내용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 특별검사가 수사하거나 중립적 위원회를 구성해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도청 내용을 수사할 때에도 형평을 기해야 한다. 구체적 범죄 혐의도 없이 광범위한 사찰을 통해 얻은 사적 대화에 근거하여,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의 잘못을 특정인에게만 추궁하는 것도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도청 테이프는 이미 폐기할 수 없는 역사적 문서가 되었다. 당장의 선정적 호기심을 냉정하게 억누르고 후일의 평가를 도모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 있다.

박종보 한양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