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좌익서적의 본사" 우니따서점이 식당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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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좌익계서적의 총본산이라 할수있는 동경 진보쬬 (곤보정) 의 우니따서포 (천대전구신전보정1의기) 가 우경화의 물길에 밀려 마침내 9월20일 문을 닫고 그자리에 식당이 들어서게 됐다. 우니따서포는 좌익계서적이라면 자본론에서부터 학생서클의 팸플릿에 이르기까지 없는게 없어 「좌익의 두뇌」라고도 불린 이색서점.
지하루트로 입수해 이서점에서 판매되는 일본적군등 과격파의 기관지류는 관계당국자들에게 귀중한 정보원이 되기도했다.
가장 번성을 누릴 시기에 항상 비치되던 각종 기관지, 팸플릿종류만 2천종에 연간 매상고 1억수천만엔을 자랑했다.
이처럼 번창하던 우니따가 폐점에까지 이르게 된것은 경제적 번영위에 좌익이 존립기반을 잃어가는 일본사회의 변모하는 세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수있다.
우니따의 32년 역사는 일본 좌익운동과 성를 같이해왔다.
우니따가 처음 문을 연것은 1950년. 일본 공산당의 분열로 당본부에서 밀려난 「엔도」 씨(소도충부·57)가 생활의 방편으로 지금의 책방자리에 간판을 걸었다. 지금은 버젓한 5층빌딩아지만 그때는 목조 바라크에 점포앞면도 지금의 절반정도밖에 안되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좌익서점은 출발부터 호조를 보였다. 50년 한국전쟁이 터져 공산주의가 기세를 올린것이 배경이 되었다.
60년5∼6월에는 이른바 안보투쟁이 불을 뿜었고 그 여파로 안보전쟁에 숨진 동경대의 여학생 평미지자의 유고집을 비롯, 길본롱명, 태전릉등 좌익계 논객들의 책이 폭발적으로 팔렸다.
69년을 정점으로 하는 대학분쟁, 전공투운동 시대는 우니따서포로서도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일본 공산당에 반대기치를 내건 이른바 신좌익각파의 기관지가 점포를 메웠다. 상시 2천종의 탬플릿을 비치했다는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대학분쟁이 사그라들고 72년의 연합적군사건, 신좌익각파의 내부 테러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면서 젊은층의 좌익추탈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우니따의 고객도 줄었다.
74년에는 과격파의 폭탄교본「하라하라 도께이」(낙복시계)를 비치했다가 경찰의 수색을 받는 곤욕을 치렀다. 【동경=신성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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