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마디] "라거(유대인 강제수용소)의 '구조된 자'들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라거(유대인 강제수용소)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만이 살아남았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중에서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난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 말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했다가 아우슈비츠로 이송됐으며 10개월 남짓 수용됐다가 살아남아 토리노로 돌아왔다. 77년까지 니스 공장에서 관리자로 일하며 아우슈비츠의 참담함을 회고록과 소설을 통해 증언했다. 87년 토리노 자택에서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그가 죽기 1년 전 출간한 작품으로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라 할 수 있다. 그는 과학자였던만큼 자신이 겪었던 것을 무서울 정도로 객관적이고 엄밀하게 바라봤다. 그는『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의심한다.

'다른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내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일 수도,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 라거(유대인 강제수용소)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만이 살아남았다. 확실한 원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칙이었다. 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97쪽)

김효은 기자 hyoe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