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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조선조를 빛낸 충절가 임경업장군 기개엔 청대종도 감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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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임씨는 우리나라 10대 성중의 하나. 인구는 약1백만명으로 추산된다. 이중 평택 임씨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70%.
임씨의 득성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중국 요임금 때 관인 한 분이 고주 태원현의 두 나무(임)아래 내려왔는데 그 용모가 실히 거룩하고 또한 재주와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 임금께서 「임」이라는 성을 내렸다』는설실.
둘째는 『중국 은나라 말엽 은왕자 비간의 아들 견이 망국의 한을 품고 장림산에 은거했기에 성을 「임」으로 삼았다』는 설.
이 두가지 설에 대해 세림문화재단 상임이사 임병운씨(『임씨요람』편저자)는 『전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신화설로 생각하며 은왕자 비간의 후예라는 제2설을 정설로 믿고 있다』 고 말한다.
우리나라 임씨의 도시조는 학사공 임팔급. 그는 중국 당나라 말엽(서기 830∼900년대) 정치적인 화를 피해 동방으로 피신한 8학사 중의 한사람이다.
「평택임씨세보서부록」에는 『…시조 한림학사공은 당나라 문종때 너무 충직하시므로 군소 간신배들의 참소를 받으셨다. 드디어 동료 일곱분과 동해를 건너 신라로 오셨다. 먼저 국가 위란을 평정하고 평석 용포리에 오셔서 살으셨다』로 기록돼있다.
관향 「평택」은 시조 임팔급이 여생을 보냈던 고을이름이다.
평택 임씨는 임팔급의 후대에 와서 「선산」 「진천」 「예천」 「부안」 「울진」 「조양」 「은진」 「순창」 「옥야」 등 25개의 관향으로 분관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모든 임씨들은 관향만 다를뿐 임팔급을 동일시조로 모시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것이 평택 임씨를 중심으로 한 대다수 문중의 공통된 견해.
다만 고려대장군 임비를 1세로 하는 나주 임씨측은 동일시조 여부에 대해 이론을 제기한다. 나주 임씨 족보에는 임비의 선대에 관해 입증할 만한 기록이 없다는 것.
아무튼 평택 임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여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임연은 고종 8년 김둔등과 함께 당시 국정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던 최헌을 제거, 정권올 왕에게 돌린 공으로 위두공신에 올랐다. 그 후 정치·군사의 실권을 완전 장악, 국정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몽고와 최후까지 항전하다 변사했다.
임견미는 고려말 최영과 쌍벽올 이루었던 무신이요 정치가. 그는 1384년 문하시중이 되어 염오방 둥과 함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여말의 정치적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최영·이성계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성계와 합세했던 최영은 그 후 한달도 못돼 이성계일파에 살해된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잘날 없는 법. 이조중종때 부재학에 올랐던 임형수(호 금호)는 을사사화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표적인 인물. 그는 소윤의 윤원형 일파에게 대윤으로 몰려 절도에 유배되고 얼마 후 사사된다. 퇴계선생이 「천하기남아」라고 불렀던 그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당대의 문신이었다. 『금호소호』가 남아있다.
인단조에 광주부사를 지내다 이괄의 난때 반란군에 살해된 임회(호관해)는 서릿발같은 기개로 가문의 명예를 지킨 문신. 그는 반란군에 붙들려 손과 발이 찢기는 사형을 당하면서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반군에게 불호령올 치며 완강히 저항, 후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유명한 송강 정철의 사위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평택 임씨는 푸르고 울창한 수풀(임)처럼 일반적으로 온건하고 조용한 성품을 가졌다』 고 한다. 그러나 『일단 불의와 마주칠 때는 불굴의 인내와 끈기로 맞서서 싸우는 강인한 기질을 타고난 문무겸비의 집안』이라고 임씨대동회장 임대홍씨(미원그룹회장)는 말한다.
가문의 기질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병자호란의 명장 임경업장군. 그는 이조 5백년사에 격동의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간 영웅이었다.
병자호란은 빈태층이 이끄는 10만 침략군앞에 왕(인조)이 무릎올 꿇고 항복했던 근세사상 보기 드문 치욕적인 전쟁. 이 치욕을 씻기 위해 청과 최후까지 항전한 장군이 임경업이었다. 친명배청을 의치며 청에 대항하다 두 차례나 청군의 포로가 되고 청으로 압송도중 금교역에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 한때 절로 들어가 중이 되기도 했다. 그 후 명으로 망명,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군과 최후의 일전을 겨루다 다시 포로가 된다. 청의 황제 태종도 그의 충성과 기개에 탄복, 차마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으로 송환된 후 반대파인 김자겸의 모함으로 살해되니 장군의 나이 53세 때였다. 『불의에 굴할 줄 모르는 가문의 기질』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구한말과 일제 하에서 숱한 우국지사를 배출했다.
구한말의 의병장 임병찬과 임창모,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임비환과 48인의 한사람인 임규, 철혈광복단의 임국정과 광복단의 임세규, 파리장서사건의 중심인물 임한주 등이 조국독립의 제단에 피를 뿌렸다. 해방 후 평택 임씨는 각계에 많은 인물들을 배출, 무성한 숲을 이룬다.
임대홍(미원그룹힉장) ,임광정(한국화장품사장), 임종협(이산업회장), 임채홍(내쇼날푸라스틱회장), 임철수(서울미원사장), 임승엽(코오롱종합건설사장)씨 등은 재계의 인맥들.
임대홍씨는 40년 이리농고를 졸업, 47년 대림상공사장으로 출발해 오늘의 미원그룹을 이룩한 원로기업인. 그는 이따금 버스로 퇴근하고 자녀들에게도 승용차를 태운적이 없으며 골프조차 사양하는 근면 검소한 기업인이다.
80년에는 사재 1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인 세림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내쇼날푸라스틱회잠 임채홍씨는 그의 동생. 현 미원그룹부회장 임창욱씨는 그의 장남이다.
임광정씨는 67년 개성상고를 졸업, 약품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태평양화학과 쌍벽올 이루는 한국화장품을 키운 장본인.
현 한국화장품 전무 임충혜씨는 그의 잠남이다.
임한경(전 서울고법원장·작고), 임기호(변호사·전 서울고법원장)씨 둥은 법조계에 우뚝선 인물들. 임막경씨는 76년에 대한 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40여년간 법조계에 몸담아온 원로. 그는 서울고법원장으로 재직 당시 4·19가 일어나자 과감히 사표를 내던지고 야인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임의선(의박·전 세브란스병원장·작고), 임관(공박·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임근수(문박·전 서울대교수·작고), 임응극(공박·서울대교수), 임선호(의박·전 전남대의대학장·광주서중 이고동창회부회장)씨 등은 평택 임씨가 배출한 서학들. 임의선씨는 71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 75년 미 하버드대학원을 수료하고 세브란스병원장, 연세대암연구소장, 병원협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 의학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 임관씨는 응용역학과 설계기초분야의 세계적인 권위. 임근수씨는 우리나라 신문학의 개척자. 임간진(변호사), 길진(공박·미 프린스턴대교수), 현진(철학·미 하버드대교수)씨 등 3형제는 그의 아들들이다.
현직 국회의원으로는 임방현씨(전 청와대대변인), 관계에는 임명진씨(주덴마크 대사) 등이 있다.
한국판소리의 전통적인 계승자요 판소리의 최후의 보루라 불리었던 명창 임방울(작고), 문화재 복원·보수의 권위였던 고고미술가 임천(작고), 임왕인(작가·전 YWCA회장), 임원직 (지휘가·경희대음대학장), 임성남(한국발레협회장)씨 등은 문화·예술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글 김창뢰 기자><사진 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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