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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영4년반동안 보고 느낀 노제국의 명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영국 특유의 술집인 퍼브에는 술을 날라다 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손님 스스로가 마실때마다 한잔씩 카운터에 가서 돈을 주고 사야된다.
술파는 시간이 낮12시부터 하오3시,그리고 하오6시부터 밤10시까지로 제한되어 있기때문에 그 시간이되면 카운터 앞은 늘 붐비게 마련이다.
술을 주문할때는 각자가 지폐를 바텐더가 볼 수 있도록 손에 들고 카운터주위에 몰려선다. 그러고 있으면 바텐더가 알아서 손님을 지적하면서『뭘 드실까요』하고 주문을 받는다. 손님이 미리 청할 경우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손님은 그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이처럼 바텐더가 주문받을 권리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가끔 문제가 생긴다. 오래 기다린 손님을 제쳐놓고 방금 나타난 손님의 주문을 먼저 받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도 언성을 높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 고작 1,2분 차이니까 기다리면 언젠가는 자기 차례가 오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런던에 와있는 유색인종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바텐더들이 백인손님들로부터 주문을 받고난 다음에야 유색인의 주문을 받는 못된 버릇이 있다는 사실이다. 1백% 그런건 아니지만 최소한 50%는 그렇다.
영국에 와서 기자가 직접 느낀 인종차별은 대개 이런 사소한 것이었다.
또 하나 사소한 예를 들면 구멍가게나 식료품가게에서 거스름돈을 속이는것을 들수 있다. 4년동안 기자가 겪은것만도 수십번이 넘는데 거스름돈을 매번 틀리게 주면서도 단 한번도 더 준적이 없는걸 보면 실수가 아닌게 분명하다.
거스름돈 속이는것을 인종차별의 예로 드는 이유는 그런 속임수의 바탕에는 유색인들이 셈을 잘못한다는 선입관이 깔려 있다는 인상 때문이다.
계산은 실제로 영국인들이 서투르다. 그러나 과거 여러 종류의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인들은 유색인을 모두 과거 식민지백성처럼 오인하고 자기들보다 지능이 낮다고 착각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지금까지의 열은 한국인·일본인 중국인등 영국사회 밖에 생활터전을 갖고있는 인종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이다. 영국에 이민을 와서 영국서민들과 경쟁적으로 살아가야 되는 인도·파키스탄·아프리카인및 중앙아메리카출신의 흑인인 경우 인종차별은 때론 생사의 혈로로 전개된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해 3월 27일 21번째 생일을 맞은「리처드·반스」라는 백인 청년은 생일기념으로 10명의 유색인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차를 몰고 가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두 명의 파키스탄계 처녀에게 건너도 좋다는 손짓을 한 후 처녀들이 길 가운데 들어서자 차 속력을 내 전진했다. 다행히 처녀들은 몸을 피해 무사했다.
그는 다른 곳에 가서 자기 결심을 실행했다. 한 파키스탄계 남자의 목을 활로 쏘아 명중시키고 주차장에 기다리고 있던 유색인 부인을 차 속에 묶어놓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다행하게도 그는 10명을 해치기 전에 경찰에 잡혔다. 이 범죄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밤중에 출입문의 편지함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일가족을 몰살시킨 사건도 있다. 그 이후 유색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서는 편지함을 막고 침실에 물통을 놓아두고 자는 사람들도 있다.
81년1월18일에는 런던 남부 뉴크로스지역에서 파티장에 불이나 13명의 흑인이 타 죽은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이 불이 원인불명이라고 단정하고 외면한데 대해 이 지역 주민들은 외부에서 화염병을 던져 불이 났으니 수사를 해말라고 요구했다.
백인의 「인종방화」를 백인경찰이 눈감아주고 있다고 이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
검시배심원이 경찰측 주장을 받아들여 사건을 종결 시키자,주민들은「뉴크로스 학살위원회」를 조직해서 국제조사위에 이 사건을 위임하자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영국이 자랑하는 법질서가 모두 엉터리다』 라고 이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다.
몇년전에는 영국 출입국관리가 입국하는 인도·파키스탄 출신의 소위「우편신부」들의 처너성을 검사했다가 물의가 일어난 적이 있다. 영국 관려들은 신부를 가장한 위장 이민이 많기 때문에 『처녀가 아니면 가짜신부』 라는 시대착오적 기준을 적용했던 것인데, 인도정부는 화가 나서 그렇다면 자기들도 보복으로 인도에 오는 영국여자들의 처녀성을 검사하겠다고 위협 한적도 있다.
인종폭력사태나 이런 모욕사례를 보면 술차례가 늦어지는 정도의 차별만 받는 영국의 한국인은 그래도 다행이다. 그러나 한국인 이민들이 취락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이나 브라질의 경우를 생각하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앰글로 섹슨」이 특히 인종차별면에서 유별나다는 속설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민족이 들어와 모자라는 일자리에 파고들 경우 인종폭력은 어디서나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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