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공식 입장을 거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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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의 역사 왜곡 사건은 외교적인 수사 따위로 어물쩡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사안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인데 일본 외무성과 문부성이 30일 우리 정부에 그들의 공식 입장이라면서 전한걸 보면 깊이 상처받은 우리의 감정을 설득으로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게 분명하다.
「스즈끼」 (영목훈) 문부성 초등 교육 국장이라는 사람은 주일 한국 공사를 만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을 둘러싼 한국 정부의 신중한 조치를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 정부의 조치는 신중하다. 그러나 신중하다고 단호하지 않은게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신중한게 우리의 주장을 자제하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한일 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시정에 최선을 다하겠다, 이것이 그가 준 유일한 언질이다. 이 언질이 급한 경우나 모면하려는 얄팍한 외교사령이라는 것은 「스즈끼」 바로 그 사람이 중의원 문교위서 한말이 증명한다. 교과서 회사들이 비록 정정 신청을 해와도 문부성은 허가하지 않겠다고 그는 말한 것이다.
「오가와」 (소천평이) 문부성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기회를 가지고 충분히 설명하면 한국이 납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한국 국민들의 의사와 감정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다는 발상이요, 한국과 중공이 저렇게 떠들다가 제물에 수그러들 것이라는 우둔한 생각이다.
문부성과 초등 교육 국장에게 분명히 말해둔다. 역사는 불행한 것이든, 자랑스러운 것이든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유산이다. 그래서 이번 역사 왜곡 사건은 한일간의 다른 어떤 문제에 우선하여, 그리고 다른 현실적인 이익이 희생되더라도 바로 잡고야 말겠다는 것이 우리의 과장 없는 결의다.
교과서 검정의 책임을 지고 있는 문부성이 이렇게 전비를 뉘우칠 줄 모르는데 『한일 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시정에 최선을 다하겠다』『…한국 측의 비판과 의견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이며, 두 나라의 이해 증진을 위해 민간 관계자들과도 함께 노력해 나가겠다』는 외무성 쪽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건 문부성이 등치고, 외무성이 배 만지는 꼴이지만 후자도 만지는 시늉을 할뿐이다. 우리는 경협 문제를 가지고도 외무성과 대장성이 이런 식으로 박자를 맞추어 온 걸 잊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관한 왜곡된 역사를, 문제의 교과서들이 83학년도용으로 학생들 손에 들어가기 전에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그 이하도 아니고, 그 이상도 아니다. 「상세한 실명」으로 납득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흐리멍덩한 일본 정부 입장을 공식 견해를 접수한 외무부 당국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문제된 교과서들의 주문 시한인 12월말까지 문제된 부분들을 사보대로 바로 잡겠다는 구체적인 약속 뿐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번 검정 때인 3년 후에 기회가 온다. 그때까지 이 불행한 사건을 안고 한일 두 나라가 어떻게 이웃으로서, 우방으로서, 그리고 가치관을 공유하는 자유 세계의 일원으로 지낼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지금 일본에서 맹렬한 기세로 대두되는 군국주의와 국가주의 경향을 보면 3년 후면 사정은 더욱 나빠질게 뻔한 일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일본의 맹성을 촉구한다. 냄새나는 과거라고 해서 그것을 덮으려는 우행은 국제 사회에서 경멸을 사고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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