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가쟁명:강성현] 주원장 시대, 반복되는 토사구팽(兎死狗烹) 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키가 크고 시커먼 얼굴에 광대뼈가 솟았으며, 주먹코와 큰 귀에 눈썹이 짙고 큰 눈망울에다 턱이 이마보다 앞으로 더 튀어나왔다. 정수리에도 뼈가 마치 작은 언덕처럼 솟아있었다. 보기 좋게 생긴 몰골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균형이 잡혀 있고 위엄과 침착함이 흐르고 있어, 누구든지 그를 한번 보면 다시는 그 괴상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오함(吳?, 1909~1969)의 역저,《주원장전 *박원호 역》의 제 1장에 나오는 얘기다.

주원장(1328~1398)의 초상화는 두 종류가 전한다. 사실에 기초해 그린 주원장의 초상화를 들여다보면, 심한 주걱턱에다 수염이 별로 없고 얼굴과 콧잔등에 주근깨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눈썹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눈매 또한 매섭다. 기괴한 주원장의 생김새를 대하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고전적 척도가 무색할 지경이다.

소작인 주오사(朱五四)의 늦둥이, 중팔(重八, 원장의 아명)은 유아 시절 잔병을 앓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가 자라날 무렵인 원말은 몽고관리의 착취와 수탈, 기근,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집집마다 돌림병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십 명이 나자빠졌다.

주원장은 안휘성 펑양(鳳陽) 사람이다. 서달(徐達), 탕화(湯和), 주덕흥(周德興) 등과 소꼴을 먹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달은 서너 살 아래였고, 탕화나 주덕흥은 원장보다 몇 살 위였다. 주원장은 일찍부터 사람을 부릴 줄 알았다. 말수가 적었고 지혜로웠으며, 의리 있고 책임감이 강해서 모두들 그를 믿고 잘 따랐다.

그가 16세 때 양친과 장남 중사(重四)가 연이어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중팔은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황각사(皇覺寺)의 행자, 떠돌이 탁발승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홍건군이 도처에서 봉기하자 그도 이 대열에 뛰어들었다.

과묵함? 탁월한 통솔력? 겸양과 지모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천하를 놓고 혈투를 벌이는 군웅 가운데 1인이 됐다. 지식이 일천하였지만 독서와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배우고 또 익혔다. 글 깨나 읽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존중하였다. 유기(劉基)나 송렴(宋濂) 같은 현자를 초빙하여 경청하고 부하들의 건의에도 귀를 열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오함은 주원장이 군웅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된 군사적 요인을 분석하였다(위의 책, 432쪽).

ㆍ 비교적 엄격한 기율을 유지하였다.
ㆍ 풍부한 식량 생산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ㆍ 둔전정책을 폄으로써 군량을 자체 조달할 수 있었다.
ㆍ 철저히 적정을 살폈고, 치밀하게 정보공작을 전개하였다.

홍무(洪武) 원년인 1368년, 만 40세의 나이로 주걱턱 ‘주중팔’이 황제로 등극하였다. 빡빡 깎은 머리에 노숙자처럼 떠돌다, 무명의 일개 병졸로 홍건군에 투신한 지 15년만의 일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 것이다. 원장은 황제가 된 후 초심을 완전히 잃었다. 독단? 아집? 시기? 의심? 분노? 잔인? 비열 등은 이 시대 주원장의 성정(性情)을 적절히 표현한 단어들이다.

그의 앞에는 6국공(六國公), 28후(侯) 등 개국공신들이 제각기 위엄을 뽐냈다. 이들은 ‘파양호(?陽湖) 혈투’를 비롯한 무수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어릴 적 고향 동무, 서달? 탕화? 주덕흥도 불멸의 전공을 세우고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주원장의 소하’(蕭何)라 불렸던, 14살 위의 이선장은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졌다.

권력을 분점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을 도와 천하를 쟁취했던 공신들이 어느새 눈엣가시가 됐다. 주원장은 특무조직인 검교(檢校), 금의위(錦衣衛)를 휘하에 두고 24시간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서슬 퍼런 특무요원의 감시망을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공신들의 죄목은 대부분 역모? 부정부패? 수뢰? 횡령 등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오만무례죄’, ‘괘씸죄’가 추가된 것 같다. 여기에 제시한 공신들의 죄목은 이견이 분분하여 주로 오함의《주원장전》을 근거로 하였다.

주원장은 혈족이나 공신을 가리지 않고 눈에 거슬리면 하나씩 없애버렸다. 사약을 내리거나 채찍을 가해 살해하는 방식이었다. 명 왕조 개국 전에, 대도독(大都督) 주문정이 제거됐다. 친조카이자 양아들로서, 진우량의 60만 대군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홍도(洪都, 지금의 남창南昌)를 석 달 가까이 방어하였다. 주원장 집단의 핵심인물이었던 주문정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함부로 행동하다 연금됐으며 채찍에 맞아 죽었다.

1375년, 덕경후(德慶侯) 요영충(寥永忠)이 용봉(龍鳳) 연호를 함부로 사용하다 사약을 받았다. 1380년, 이른바 ‘호유용(胡惟庸) 모반사건’으로 숙청의 서막이 올랐다. ‘호옥(胡獄 *호유용 옥사 사건)’으로도 불린 이 사건은 장장 15년 가까이 진행됐으며, 이로 인해 공신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 처형됐다. 극에 달한 황제의 분노는 제어할 길이 없다. 호유용을 죽인 뒤 주원장은 승상 직위를 없애버렸다.

호유용은 이선장과 같은 정원(定遠, 안휘성 동부) 사람이었다. 이선장의 천거로 중서성의 요직에 발탁됐으며 우승상을 거쳐 마침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좌승상 자리에 올랐다. 의심 많은 주원장에게 국정을 함부로 주무르는 호유용은 속히 제거해야 할 ‘가시’에 불과하였다.

《명사? 호유용전》에 기술된 그의 죄상을, 펑위쥔(馮玉軍)이《십족을 멸하라 *김태경 역》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펑위쥔, 위의 책, 64~66쪽).

ㆍ죄인의 생사를 임의로 결정
ㆍ관리들의 승진? 강등? 상벌 남용
ㆍ정무를 임의로 판단하여 처리
ㆍ길안후 육중형(吉安侯 陸仲亨), 평량후 비취(平凉侯) 등 황제에게 문책 당한 자들과 모반
ㆍ베트남 사절단의 입궁을 보고하지 않음
ㆍ아들이 말에 떨어져 죽자 마차를 몰던 마부를 함부로 살인

그의 사후에도 일본 및 원나라 잔당과의 내통죄 등 죄목이 속속 추가됐다. 오함은《호유용 당안고(黨案考》에서, 호유용의 죄상은 대부분 근거 없는 것들로 억울하게 누명을 썼음을 밝혔다(펑위쥔, 위의 책, 70~71쪽).

대학사 송렴은 주원장이 천하 쟁패에 나설 무렵, 주원장의 부름을 받았으며 태자의 스승을 지낸 인물이다. 68세 되던 해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다.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던 주원장은 그에게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백세의(百歲衣)’를 지어 입으라며 비단 한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송렴마저 내쳤다. 손자 송신(宋愼)이 호유용 모반 사건에 연루되자, 1381년 그도 귀양길에 올랐으며 ‘화병’으로 죽었다.

1384년 외조카이자 주원장의 양자였던 조국공(曹國公) 이문충(李文忠)도 직언을 하다 양부의 눈에 거슬려 독살 당했다. 살육 행위를 줄이고, 왜와 전쟁을 벌이지 말며, 환관을 지나치게 의지하지 말라고 충간하여 미움을 산 것이다. 같은 해, 금령을 어겼다며 대장군 임천후(臨川侯) 호미(胡美)를 처형하였다.

1385년, 오랜 전우였던 위국공(魏國公) 서달 또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쩌우지멍(鄒紀孟)은《권력규칙(제1권) *김재영 역》에서 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서달은 주원장에게 한신과 같은 존재다. 주원장과 일생동안 고락을 같이하며, 주원장이 치른 주요 전투에 모두 참가하였다.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가 그에게 쫓겨 도주했다. 원의 주력을 궤멸시켰으며 북경을 탈환하였다. 전투 때 마다 매번 선봉에 섰다. 인품도 고매하였으며 재물도, 여색도 탐하지 않았다. 듬직하며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인 서달을, 주원장도 ‘해와 달처럼 빛나는 인물’로 칭송하였다. (…)

서달의 등에 등창이 생겼다. 등창에 피해야 할 음식이 바로 찐 거위 고기(蒸鵝肉)라고 한다. 찐 거위 고기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찐 거위 한 마리를 하사했다. 서달은 가족에게 더 큰 재앙이 닥칠 까 두려워 찐 거위 고기를 먹고 죽음을 맞이하였다(쩌우지멍, 위의 책, 364~366쪽).”

호유용 사후 10년 만인 1390년, 77세의 이선장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이선장은 공신 서열 1위로서, 아들 이기(李祺)와 원장의 장녀 임안(臨安) 공주가 혼인함으로써 사돈관계를 맺었다. 그는 주원장과 같은 회서(淮西) 출신으로서, 백관을 이끌고 주원장의 황제 등극 의식을 주재하였다. 그러나 10년 전 사건을 들춰내, 호유용 역모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며 처와 딸, 조카 등 70여 명을 몰살하였다.

지난 날, 주원장은 이선장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

“…선장이 짐의 휘하에 찾아들어 같이 마음을 모아 계책을 짜내고 양자강을 함께 건너 남경에 자리 잡았노라. 1, 2년 사이에 수십만 군사를 모아 천하를 누비며 정벌하는 동안, 선장이 나라 안에 남아 식량과 병기를 각지로 운송했는데 단 한 번도 모자란 적이 없었다. 또한 후방을 다스림에 있어 군대와 백성을 화목하게 하고 위와 아래를 서로 평안하게 했으니, 실로 하늘이 짐에게 내린 사람이다(위의 책, 361쪽).”

주원장은 ‘하늘이 내린 인물’, 이선장에게 ‘면사철권(免死鐵券 *목숨을 보장하는 징표)’을 내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러나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며 개국 원로를 제거한 것이다.

1392년, 원장과 호형호제하던 강하후(江夏侯) 주덕흥은 부인의 품행 문란죄로 살해됐다. 토사구팽의 비극은 반복됐다. 1393년에 대장군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 모반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남옥(藍獄)’이라 불렸다. 남옥은 상우춘(常遇春)과 서달이 죽고 나서 군대를 통솔하여 정복 전쟁에 나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도 금의위의 섬세한 촉수에 걸리고 말았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죄명은 이렇다.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으며, 관직이 낮다고 불평불만을 일삼았다. 마음대로 장교의 승진과 파면을 결정하였다. 그에게도 전가의 보도처럼, ‘괘씸죄’에다 ‘방약무인죄’, ‘제멋대로 한 죄’가 보태졌다. 이 사건으로 남옥 휘하의 맹장들이 모조리 처형당했으며 피의 살육이 계속됐다. 여기에 연좌돼 죽은 자가 무려 1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주원장은 거의 한 세대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벌였다. 그 뒤, 어느 날 ‘가시 돋친 지팡이’를 땅에 놓고 후계자인 아들 주표(朱標)에게 훈계하였다. 야사에 전하는, 유명한 ‘가시 돋친 지팡이’ 일화는 구구각색이나 근본 줄거리는 대동소이하다. 다음은 리정(李政)의《권력의 숨은 법칙 *이은희 역》에서 발췌한 일화다.

“하루는 태자를 데리고 교외로 나간 주원장이, 길가에 떨어져 있는 ‘가시 지팡이’를 가리키며 태자에게 말했다. ‘가서 주워 오너라.’ 태자가 어리둥절해하며 지팡이를 주우러 다가가 보니, 온통 가시투성이라 난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원장은, 시종에게 겉에 있는 가시들을 모조리 제거하게 했다. 그러자 선뜻 지팡이를 받아 가져오는 태자를 보고 주원장이 말했다. ‘가시 돋친 지팡이’를 손으로 잡기 어렵듯이, 신하가 스스로를 대단히 여기고 오만하면 다스리기 어렵다. 내가 개국공신들을 일일이 죽인 이유는 너를 찌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장차 네가 신하들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리정, 위의책, 59~60쪽).”

주원장과 함께 간난신고를 겪으며 ‘지팡이’ 역할을 했던 장군? 가신 그룹들이 ‘토사구팽’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주 씨 천하’를 이어갈 태자 주표(朱標)가 39세에 갑자기 죽었다. 그러자 15세에 불과한 손자 윤문(允?)에게 황위를 물려주는데 있어 위협이 되는 마지막 가시 제거에 나섰다. 1394년, 송국공(宋國公) 풍승(馮勝)과 다음 해에 영국공(潁國公) 부우덕(傅友德)도 누명을 씌워 참수하거나 독살하였다. 홍무 말기에 친사위인 부마도위(駙馬都尉) 구양륜(歐陽倫)은 차를 밀매한 죄로 처형됐다. 후계자의 정권유지에 부담이 되는 탐관의 싹을 아예 뿌리째 뽑아버린 것이다.

‘숙청의 늪’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들도 있다. 고향 형뻘인 탕화는 병권을 스스로 반납하고 낙향하여 멸족의 화를 면했다. 조국공(曹國公) 이경륭(李景隆, 이문충의 아들), 무정후(武定侯) 곽영(郭英), 숭산후 (崇山侯) 이신(李新) 등은 상당 규모의 봉토와 재산, 노복 등을 토해내고 규정대로 세금을 냄으로써 화를 면했다.

빈천한 농민 집안 출신에다 떠돌이 중 생활을 한 주원장은 출신과 가문에 대한 지독한 열등 콤플렉스를 지녔던 것 같다. ‘승(僧)’, ‘적(賊)’, ‘광(光 *빡빡머리)’, ‘독(禿 *대머리)’ 등의 글자에 민감하였다. 사람 이름에 천(天), 국(國), 군(君), 성(聖) 등의 글자를 쓰는 것을 금하였다. 터럭하나라도 흠집을 잡아서 처단하였다. 소위 ‘문자옥(文字獄)’이다.

‘문자옥’은 홍무 17년부터 홍무 말기까지 13년에 걸쳐 지속됐다. 문자옥으로 희생된 사람만도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주원장 시대는 보기 드문 광기의 시대, 살육의 시대였던 것이다.

명사(明史) 연구의 권위자 오함은, 1376년의 ‘공인(空印 *인장이 찍힌 백지 문서) 사건’과 1385년의 ‘곽환(郭桓) 양곡 횡령 사건’으로 7~8만여 명이 처형됐다고 증언한다. 양대 사건과 ‘호옥’, ‘남옥’, ‘문자옥’으로 희생된 사람을 포함하면, 어림잡아도 20만 명 이상의 인재를 도륙한 것이다. 폭군 주원장의 몰골을 떠올리자 ‘희대의 살인마’, ‘인간 도살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드라마 <주원장 전기>에 보면, 죽음을 앞둔 주원장이 나지막이 읊조리며 참회한다.

“둬싱부이 비즈비(多行不義, 必自?, 악행을 저지르면 반드시 자멸한다)!”

오함은 주원장에게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었다. 주원장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렇다. 천하를 안정시켜 백성들이 발 뻗고 잘 수 있게 하였다. 노예를 해방시켰고, 농업생산을 장려하고 상업을 보호하여 경제적 기초를 다졌다. 엄격한 법 집행으로 탐관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마디로, 과오보다 공로가 크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에 반해,《추악한 중국인》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보양(柏楊)은《중국인 사강(中國人 史綱)》에서 독설을 퍼부었다.

“주원장은 비열한 심리를 지닌 인물로, 이상하게도 관원과 사대부들이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 데 강한 질투를 느꼈다. 그는 이 같은 심리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공신들을 박해한 것이다(위의 책, 60쪽 재인용).”

주원장은 30년을 집권하였다. 그는 ‘주 씨 천하’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재위 기간 내내 ‘피의 향연’을 벌였다. 주원장 시대에 되풀이 된 ‘토사구팽’의 비극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권력의 비정함을 일깨워준다. ‘권력의 늪’은 어둠이 깔린 늪지처럼 음산하다. ‘권력의 늪’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권력을 멀리 하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