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25) 제 8구단 창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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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1986년 빙그레 이글스가 페넌트 레이스에 참가하면서 프로야구는 7개팀 리그로 운영됐다. 7개팀 리그의 단점은 6개팀이 경기를 치를 때 한 팀은 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스템에 대해 7개 구단은 시즌 초반에는 불만이 없었으나 시즌 후반에 가면 불평들을 했다. 포스트시즌 진출을 향한 순위 경쟁이 뜨거운 상황에서 며칠 쉬고 난 팀과 맞붙는 팀은 아무래도 불리했기 때문이다. KBO로서도 그런 불만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7개팀 리그로 세번의 시즌을 보낸 이후인 88년 후반부터 자연스럽게 제8구단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창단 계획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89년 1월 16일 이사회에서 제8구단 창단 계획을 공식적으로 통과시켰다.

제8구단을 90년 2군리그에서 뛰게 하고 91년부터 1군 정규리그에 참여시킨다는 계획이었다. 7구단 창단 때와 마찬가지로 연매출액 5천억원이 넘는 건실한 기업을 대상으로 하되 가입금은 7구단 때 30억원이었던 점을 감안해 70억원으로 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당시 연고팀이 없는 지역 가운데 충북과 강원은 마땅한 기업이 없었다. 그래서 연고지는 경남과 전북으로 압축됐다. 한일합섬은 마산(경남)을 연고지로 희망했고 82년부터 꾸준히 사람을 보내 프로야구 참여를 희망해온 기업이었다.

8구단 창단 계획이 세간에 알려지자 매스컴에서는 예상보도를 하기 시작했다.'한일합섬, 마산 연고지로 제8구단 참가' '전북 군산에 자동차 공장이 있는 대우, 전주 연고지로 8구단 참여'등의 기사가 연일 신문 지상에 보도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2월 하순 전북 도정 순시 때 강현욱 전북도지사에게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자 전북 관계자들이 8구단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노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던데다 매스컴에 마산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많이 나오자 빼앗길까봐 조바심이 난 것 같았다.

3월6일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안성호씨와 전북일보 사장을 지낸 진기풍씨가 사무실로 찾아와 꼭 전북에 팀을 유치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전북도민 애향본부에서는 프로야구단이 도민 화합의 구심점이 되니 꼭 창단하고 싶다는 건의서를 보내왔고, 쌍방울 이의철 사장은 야구단에 의욕적인 투자를 할 것이며 훗날 전북도민의 구단으로 발전시키고 싶다며 강한 창단의사를 밝혔다.

전북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가운데 한일합섬에서는 정식으로 창단 신청서를 냈고 기자회견을 열어 마산 연고로 팀을 창단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한일합섬과 쌍방울이 창단의사를 밝히자 희망 연고지의 기존 구단인 해태 박건배 회장과 롯데 신준호 구단주는 왜 하필 자신들의 지역에 팀을 만들려 하느냐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서 최종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전북 김제 출신의 최낙도 평민당 의원이 찾아와 김대중 총재가 팀을 호남에 유치하는 것도 좋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해왔다. 이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우선 해태측의 반대가 수그러들었다. 롯데는 경남 연고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북팀이 창단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결국 쌍방울-미원이 공동출자하고, 가입금을 50억원으로 낮추되 그 가운데 10억원은 해태에 광주 구장 증설비로 준다는 조건으로 제8구단의 창단이 최종 결정됐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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