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홍 대사 모두에 부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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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 주미대사가 청와대에 사의를 표명했다. 청와대는 "주미대사로서 현안 처리에 필요한 시간을 감안해 사의를 받아들일 방침"이라고 26일 밝혔다.

홍 대사는 지난 2월 말 워싱턴 현지에 부임했다. 북한 외무성이 2월 10일 핵 보유를 시인하고 6자회담에 무기한 참가 중단을 선언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상황이 예측키 어려운 최악의 위기로 치달은 시점이었다.

홍 대사는 부임 후 일단 워싱턴 포스트.뉴욕 타임스 등 미 주요 언론과의 오랜 교분을 발판으로 미국 조야의 대북 강경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정부 관계자들은 전했다. 주한대사 시절부터 교분을 나눠온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호흡을 맞춰 미국 측의 유연한 대북 접근을 이끌어내는 데도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6월 11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홍 대사 등 우리 외교팀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북핵 포기 때 다자 안전보장 제공과 북.미 간의 보다 정상적인 관계 추진" "미국은 북한 침공 의사가 없다" "한.미 동맹 강건하다"는 약속을 받아내면서 6자회담 재개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했다. 당시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한.미 정상회담 성사에는 홍 대사의 역할이 컸다"고 밝혔다.

홍 대사는 특히 이달 1일 우리 주미대사로는 처음으로 북한의 박길연 유엔 주재 대사와 회동을 하고 막판까지 6자회담 참가를 저울질하던 북한을 회담장으로 유인해 내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외교부에서는 "인적 네트워크가 가장 강한 주미대사"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베이징 6자회담 준비에 여념이 없던 홍 대사는'과거사' 암초에 부닥쳤다. 8년 전에 만들어진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의 존재를 알린 21일자 조선일보 보도를 시작으로 방송에 테이프 내용이 공개되면서 파문이 확산된 것이다. 한번 물꼬가 터지자 불법 도청과 불법 유통, 공개의 문제점과 내용의 진위 여부 등은 사라지고 테이프에 담긴 내용에만 초점이 맞춰졌고, 이는 홍 대사와 정부 모두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5일 불법 도청으로 만든 정보와 공개되지 않은 정보 간의 형평의 문제를 거론했고, 청와대는 "홍 대사 거취문제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홍 대사는 이날 밤 서울의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해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대통령에게 자진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불법 도청 테이프 공개로 나라가 혼란에 빠진 데 대해 책임을 지고 대사직을 물러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안타깝다"는 심경을 토로했다고 김만수 대변인은 전했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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