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 기자의 '고전적 하루'] 지휘자는 뭐하는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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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정 기자의 '고전적 하루'

솔직히 지휘자는 한가해 보인다. 무대 위 오케스트라 단원 100여 명은 각자 악기를 연주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지휘자는 어떤가. 혹시 박자만 젓는 사람은 아닐까? 또는 음악의 분위기에 맞는 동작을 청중에게 보여주는 사람? 게다가 악기 연주자들 앞에는 저마다 악보가 있다. 이들은 연주 중에 지휘자를 계속 보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음악가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이제 억울한 지휘자들을 무대 위로 불러보자. 유튜브에서 지휘 영상을 직접 보고, 결론을 내려본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수석인 임가진씨가 연주 영상의 분석을 함께 했다.

박자 세기는 지휘의 일부분일 뿐
누구에게나 익숙한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1악장을 보자. 유명한 첫 네 음이 나온다. 그런데 지휘자마다 박자를 다르게 센다.

①구스타보 두다멜의 ‘운명’


연주자들이 따라가기 쉬운 지휘다. 어떤 속도로 갈 것인지 미리 알려주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곡의 첫 마디는 쉼표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이전의 기본 박을 지휘봉으로 세어준 후에 음악을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손만 잘 보고 있으면 박자를 바로 따라갈 수 있다.

②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운명’


어떤 속도로 갈 것인지 예고 없이 바로 시작했다. 말하자면 첫 마디의 첫 쉼표부터 세기 시작한 것이다.

③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운명’


임가진씨는 “첫 소절을 이렇게 지휘하면 단원들은 오로지 악장만 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토스카니니는 그저 ‘시작하라’는 신호만 줬다. 속도는 어떤지, 박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좋은 오케스트라의 경험 많은 단원들이 필요한 지휘 방식이다.

전체 악보는 지휘자만 본다
④세르주 첼리비다케의 ‘운명’


가장 밋밋하고 건조한 오프닝이다. 지휘자는 그야말로 박자만 정해주고 있으며, 별다른 특징이 없다. 하지만 첼리비다케 지휘의 특징은 뒤로 갈수록 드러난다. 필요한 부분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중립적으로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어떤 부분은 지루하지만, 진짜 하이라이트는 제대로 다가온다. 동영상의 5분 40초쯤에 마지막으로 다시 나오는 네 개의 주제음을 들어보자. 그렇게 밋밋하고 재미없던 첫 마디가 이렇게 발전해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제의 발전을 논리적으로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지휘는 건축적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작은 차이가 연주 내내 영향
이제 다시 ①~③ 동영상을 보자. 첫 네 개 음 중 마지막 음을 얼마나 길게 끄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 토스카니니가 가장 길고, 그 다음이 두다멜이다. 아바도는 가장 짧게 끊어버린다. 똑같은 악보를 두고도 이처럼 다르게 연주한다. 사소한 차이 같지만, 이 오프닝은 연주가 진행되는 내내 영향을 준다. 토스카니니와 두다멜의 연주는 웅장하고 장대하다. 아바도의 음악은 절제돼 있다.

지휘자들은 이처럼 전체 음악을 무대 뒤에서 조리해 들고 나오는 셰프다. 메뉴(연주 곡목), 재료(악기 배치, 오케스트라 규모)를 정한다. 또 조리 방식, 양념, 요리의 온도 같은 모든 것을 정해서 한 접시를 완성시킨다. 무엇보다 단원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부분만 나온 악보를 보고 있다. 모든 섹션이 들어있는 악보는 지휘자만 들고 있다. 즉 전체 그림은 지휘자만 그리고 있는 셈이다.

지휘자가 없더라도 오케스트라 연주는 진행될 수 있다. 특히 숙련된 오케스트라일수록 그렇다. 하지만 음악 전체의 일관된 메시지는 사라질 것이다.

단원들과 심리전을 치르는 리더
이제 문제는 지휘자가 자신의 생각을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다. 메릴랜드 대학의 이아니스 알로이모노스 교수는 2012년 지휘자를 주제로 실험을 진행했다. 지휘봉 끝, 바이올린 단원들의 활 끝에 적외선 불빛을 달고 촬영해 이 둘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분석한 것이다. 그리고 두 불빛이 높은 상관관계로 함께 움직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일치도는 지휘 경험이 길수록 높았다.

지휘자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연습 시간에 말로, 또는 무대 위에서 손짓 발짓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임가진씨는 “초보 지휘자일수록 연습 시간에 말이 많지만 효과적인 경우는 드물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지휘자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휘자는 자신이 연주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대 위에서 설명해야 한다. 지휘 테크닉은 물론, 표정ㆍ동작으로 다 나온다. 지휘자의 표정에 따라 음악이 어떻게 다른지 볼 차례다. 이번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의 하이라이트다.

①두다멜의 ‘합창’


4분 15초쯤부터 시작되는 하이라이트를 들어보자. 임가진씨는 “지휘자가 저런 표정과 제스처로 연주하는데 단원들이 그 감정을 쫓아가지 않기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음 동영상을 비교해보자.

②크리스티안 틸레만의 ‘합창’


1시간 2분쯤에 똑같은 하이라이트가 나온다. 하지만 틸레만은 침착하고 냉정하다. 10분 후쯤 나오는 피날레에서도 마찬가지다. 두다멜이 흥을 참지 못하고 방방 뛰어다닌다면, 틸레만은 굳건하고 이성적으로 음악적 감정의 최정상을 향해 올라간다. 단원들은 당연히 다른 음악을 연주할 수밖에 없다. 청중도 다른 감정으로 음악을 듣게 됐다. 결국 이 차이는 두 지휘자의 머릿속에 있는 음악에 대한 생각 차이인 것이다.

임가진씨는 지휘자에 대해 “단원들에게 음악의 전체 구조를 그려주는 사람”이란 결론을 내렸다. 또 “자신의 생각대로 오케스트라를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두 번째 정의는 좋은 지휘자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는 “복종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어떤 영적인 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휘 테크닉이 좋다거나, 머리가 좋아서 음악의 구조를 모두 외우고 있는 것 등과는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그는 “마치 어떤 사람 앞에만 가면 착한 아이처럼 굴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 이유는 잘 모르면서 말이다. 좋은 지휘자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단원들이 최선을 다해 연주하며 그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표현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따라서 지휘는 일종의 심리게임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대 위뿐 아니라, 일반 사회 조직에서 리더와 비슷하다. 특별한 능력, 높은 지능지수와는 별개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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