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공포'…소리없는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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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기부의 '불법 도청 X파일'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면서 도.감청을 탐지하는 보안 전문업체가 특수를 누리고 있다. 26일 한국정보통신㈜ 직원들이 전문 장비를 이용해 탐지 작업을 하고 있다.박종근 기자

서울의 기계부품업체 A사는 26일 대표이사실과 임원실 등에 혹시 도청 장치가 없는지 탐지 전문 회사에 조사를 의뢰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평소 전략회의 내용이 경쟁업체에 흘러들어간다는 의심이 있었는데, 최근 도청 논란이 일며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고 말했다.

불법 도청에 대한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에스원.코세스코리아.한국통신보안.독스콤 등 도청 탐지 업체에 따르면 최근 도청 조사 의뢰가 평소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의뢰자는 대부분 기업들이다. 과거 정치권 등에서 도청 논란이 일 때면 30~50% 정도 조사 의뢰가 늘곤 했으나 이번에는 특히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의뢰 내용도 전에는 전화 도청 여부를 알아봐 달라는 것 위주였으나 최근에는 사무실 내에 도청 장치가 돼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주문이 부쩍 늘었다.

탐지업체 관계자는 "최근 문제가 된 불법도청 사건에서처럼 전화 통화뿐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 나눈 얘기도 도청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심지어 어떤 의뢰 기업은 호텔에서 사업상 모임 예약을 하면서도 가명을 쓸 정도로 도청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휴대용 소형 도청 감지 장치를 찾는 문의도 잇따르고 있다. 도청이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퍼져 있다는 불안감에 의심이 날 때마다 즉석에서 확인해보려는 심리다. 그러나 도청 탐지 전문가들은 "소형 휴대용 감지 장치는 감도가 떨어져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정이나 개인의 일상 생활에서도 도청 불안이 퍼지고 있다. 한 민간 보안업체 관계자는 "배우자가 나의 불륜을 의심해 전화에 도청장치를 단 것 같다"며 이를 확인해달라는 의뢰도 꽤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소송이 진행 중인데 상대방이 나를 도청하는 것 같다"는 의뢰도 있다고 한다.

도청 불안은 기업의 비용과 시간의 손실로 이어지고 있다. 도청 탐지 업체에 따르면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는 대표이사실.비서실.임원실.회의실 등에 도청장치가 있는지 모두 다 조사하려면 전문가 3인이 꼬박 하루 동안 작업해야 한다. 사실상 하루 동안 기업의 의사 결정이 마비되는 것이다. 에스원은 아예 도청 탐지 장치를 대표이사실 등에 상시 설치해 놓고 도청 전파가 잡히면 즉석에서 경보를 울리는 서비스도 하고 있다.

도청 불안 때문에 보안 관련 서비스업체는 때아닌 특수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13곳의 감청탐지 업체가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등록 허가를 받고 감청탐지 장비를 제조.수입하는 등 보안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업계에선 올해 통신 보안서비스 시장의 규모를 약 100억원대로 추산하고 있는데, 이번 'X파일' 파문을 계기로 관련 매출이 20~30%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에스원 조성룡 통신보안담당 팀장은 "전화에서 잡음이 많이 나는 경우는 도청을 의심해야 한다"며 "전화국에 신고만 해도 통화 연결 선로를 바꿔주기 때문에 도청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woongjoo@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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