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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자 자술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결혼과 사업동기>
79년12월 중순께 이철희 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철희 의 현직은 국회의원이었습니다.
당시 본인의 직업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77년7월14일 신안 앞바다 골동품취득혐의로 2년 동안 집행유예를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노출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78년에는 불교계에 용두관세음보살 상 조성복원의 인연으로 투신, 단지 불사에만 전념했고 생활비용은 현금50억 원 상당이 단자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풍족한 위치에서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철희 를 만나 모든 주위 가족들의 권유와 본인과 이철희의 진실한 인연이 닿아 80년 1월께 에 대흥사에서 가족들만 조촐히 모여 부처님 앞에서 맹세하고 5월 혼인 신고를 한 후 6월 청담동 자택을 준비해 동거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이철희는 유정회 가 해체되어 무직으로 있었으며 더구나 국회의원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정치 규제자로 낙인 찍혀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본인은 과거 74년도부터 증권에 투신하여 이재를 한 경험을 갖고있었고 여자이면서도 남다른 경제를 운영하여 현장 (시장)에서 현실적으로 재산을 모은 경험이 있었기에 본인은 남편의 과거 국가기관에 종사하였을 때의 실력과 두뇌 등 여러 가지 남편의 저력과 능력이 사장되어 무위도식을 하게된 점이 무척 가슴 아팠고 본인남편 이철희 가 59세에 이르렀기에 이때를 무위도식으로 보낸다면 제2의 인생을 창조해 나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워지겠다는 판단이 들어 본인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해 남편에게 기업을 일으켜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두뇌, 당신의 노력 같으면 충분히 훌륭한 기업인이 될 수 있다』고하며 과거의 모든 관직의 개념에서 벗어나 말년은 경제인 혹은 기업인으로서 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주체성 있는 생활패턴이 된다고 강력히 본인이 요구를 하니 본인 남편 이철희 도 마음의 결심을 내린 듯 아직까지 전혀 경제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고 단지 정부에만 종사해왔는데 이제부터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여 바람직한 기업인이 되어 보겠다고 결심을 굳히는데 이르렀습니다.
가장 급선무는 아직 젊고 유능하고 순수한 현장기업인들을 접촉함으로써 가장 빠르게 기업생리를 배우게되고 또 수익성을 배우기 위해서는 본인이 취급했던 증권분야를 배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본인이 판단되어 무엇을, 어떻게, 어떠한 사람과 시도해볼 것이냐에 대해서 본인이 연구한 결과 앞으로 신장될 수 있는 유망한 업체를 선정하여 경제유대를 맺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판단되어 유망업종으로서는 등락과 이윤의 폭이 큰 건설업체로 해야하겠다고 생각하던 중 본인이 창건한 각 진선원 신도회장 이진선 으로 부터 불자인 라이프주택 조 회장을 소개받게 됐습니다.
또 김수철과 상의하던 중 공영토건 변상우 사장을 경영대학원 동기생이라고 소개받았습니다.
이철희 가 어음을 전달한 것은 처음 본인이 의도하던 바 유능한 기업을 자주 접촉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현장감각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목적이 우선하였기에 이철희 가 맡아서 움직이기만 했을 뿐 모든 내용은 본인이 해주었습니다.
10월 중순께 증권부분 일이 꼬이기 시작하여 계산이 복잡해짐에 따라 이철희 는 경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또 어음운영의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시간도 단축하고 본인남편이 당신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신경질을 내기 시작해 본인이직접 변상수 를 만나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후략)

<사업실패의 원인>
1. 1981년10월부터 본인은 본인이 당초에 계획하고 목표하여 성취하려했던 주식투자에 대한 계획이 80%실패로 돌아섰음을 깊이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 실패를 인식하게된 동기는 다음 과 같습니다
본인은 본인의 남편이 작년6월에 롯데빌딩에 대화산업을 창업하여 운영하기 시작할 즈음부터 본인과 본인남편에 대한 신상의 소문이 증권가에 떠돌기 시작하였으며 90일 어음을 할인하여 주식을 매입했는데 팔아서 현금으로 결제해야할 시기만 되면 갖은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아 심리적으로나 행동 면에서나 상당히 위축을 느꼈으며 되도록 소문 때문에 쉬쉬해서 팔려고 하니 가격은 2백∼3백원정도 하락된 시세로 팔지 않으면 현금 수습이 안되어 공영·일신·라이프의 돌아오는 어음을 결제할 수 없게 되므로 본인이10억 원에 매입했었다 한다면 현금은 7억 원 을 받고 팔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이 점점 더 전례를 남기어 상대편들은 이미 본인의 허점과 은행교환 결제는 주식을 팔지 않으면 될 수 없다는 약점을 간파하여 온갖 소문이 나돌고 주식은 파격적으로 싸지 않으면 살 사람이 없고 증권시장에서 하루 조금씩 팔아 가지고는 몇 십억 원씩 하루에 돌아오는 현금결제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본인은 급한 나머지 심지어는 완전반액의 시세로 팔아서 은행에 돌아오는 어음을 결제해 주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본인에게 어떤 남자와 여자가 전화를 해 증권가나 사채가 에 말 한마디만 퍼뜨려놓으면 당신들은 골로 간다는 등 당장 증권에서 손을 떼라는 등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0월부터는 본인을 내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확 돌면서 실제로 본인의 거래처 (김종무)에 수사관 둘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본인은 당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인은 거래나 장사와는 상관없이 위축되고 불안하여져 활동을 앞에서 못하고 뒤에서나 우물쭈물하니 기히 일으켜진 어음결제시일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것을 막느라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현재 본인의 처지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벌여왔음을 통감하고 하루속히 최선을 다해 부도를 막고 보유주식전부를 어떠한 가격이라도 살 사람만 있으면 정리하여 증권과 사채에서 손을 떼고 결손 부분은 은행이나 단자회사를 통해서 장기적으로 빌어 그 다음단계를 처리해 나가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11월부터 은행 및 단자회사에 예금조성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0월 현재 본인의 결손 부분을 대충 인식한 것은 5백억 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손실을 감안하더라도(본인의 작년 그때의 생각임) 엉뚱하고 해괴한 소문을 근절시켜야한다고 생각했었기에 본인의 남편과는 상의도 없이(또한 본인의 남편은 경제도 모르고 본인만 믿고 본인이 해달라는 부분만 본인부탁에 의해서 거래해준 것 뿐이오며 경제나 증권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입니다)당초에 이익을 내겠다고 세웠던 목표와는 아랑곳없이 물건을 있는 대로 다 정리해서 라이프와 처음 일으켰던 관계를 청산하고, 청산내용으로서는 두 달 동안 6백억 원을 갚았습니다.
다음 번으로 경남을 청산하니 3∼4개월 동안 두 회사를 청산했고 공영토건의 돌아오는 어음을 결제하는데 결손의 부분이 한없이 불어나니 공영토건의 교환결제가 여의치 못하게 되어 어음 량을 확대하여 사채에서 할인하여 막아주고 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무모한 저의 행위로 인하여 끼치게된 누를 생각한다면 본인의 생명을 버려도 보상이 안된 다고 생각하오며 최선을 다하여 이익을 본 사람을 규명하여 기회와 약점을 이용하여 정상이 아닌 이익을 본 부분에 한하여서는 본인이 최선을 다하여 호소하여 환원 되도록 시도하고 싶사 오며 본인 및 본인의 남편 재산 일체는 이미 제출한 포기서 대로하겠습니다.
참으로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용서해 주시 오며 본인이 저질러놓은 일 이옵기에 단 며칠만이라도 본인이 피해액을 줄이는데 생명을 걸고 최선을 다하고 난 후에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하겠나이다.
1982년5월19일
진술인 장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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