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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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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족의 애환이 담긴「정선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아리랑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려 말 충신 전오륜. 그는 고려 공류왕때 대제학(대제학)에까지 오른 당대의 명신 이었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위해 관향인 정선으로 낙향, 서운산 기슭에 은거한다. 그리고 만수산 검은구름(이성계 일파의 음모)이 몰려드는 정들었던 서울 송경을 바라보며 망국의 울분을 아리랑의 가락에 띄워보냈다.
울분을 노래에 담아
때문에『정선 아리랑에는 전씨 문중의 충절의 기개가 서려있으며 이「충」과「의」의 정신은 2천년 전씨 문중의 혼』이라고 전중윤씨 (전씨중앙종친회장·삼양그룹회장)는 말한다.
전씨의 시조는 백제 개국공신 전굉. 그는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저가 부서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오간, 을음등과 함께 온작을 도운 10여명의 공신중의 한사람으로 후에 환성군에 봉해진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 속 에 환성군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고 만다.
신라통일 이후 전씨 문중에서 우뚝 선 인물은 견훤. 그는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입국,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 했을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신라문화를 꽃 피우게 한 대표적인 인물. 후에 벼슬이 전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에 봉해지니 자손이 번성하여 50만.
정선군의 후대에 와서 전씨문중은 정선파, 천안파, 성산파등 18파로 분류된다. 그렇지만 『전씨는 환성군을 시조로하고 관향은 정선을 대종으로하는 단일본』이라고 전병환씨(전씨령남대동종친회장)는 말한다.
이렇듯 전씨는 역사 깊은 명문벌족으로 신라·고려조를 통틀어 봉군(봉군) 35명, 정승 (정승) 12명, 판서심명등을 배출 했으며 이조에는 문과급제자만 57명을 낳았다.
전씨문중을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고려개국 삼충공(삼충공) 전이갑·의갑·악등 3형제.
서기927년 후삼국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족은 친병5천을 거느리고 전의갑등 3형제와 신승겸등을 장사로 삼아 팔공산 오동 숲 (현 대구 북쪽지방)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당하는 위기를 겪는다.
『적의 포위망은 시시각각 좁혀 드는데 왕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때 전이갑이 왕건으로 가장,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는 사이에 왕건은 극적인 탈출을 감행 한다. 그리고 이갑등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강렬하게 전사한다.
고려 3충공나와
전씨문중은 고려개국의 삼층공을 낳은 집안 이었기에 고려조를 통틀어 가문의 번성과 세도를 누렸다. 그러나 이씨조선의 개국과 함께 가문의 세도는 기울기 시작한다. 불사이군 (부고군)의 충절이 가문의 쇠퇴의 길을 재촉한 것.
정선아리랑의 작가 전오륜에 이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대표적인 인물은 여말 공조판서를 역임했던 전순과 병부상서에 올랐던 전신.
전순은 이성계 일파의 득세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봉읍(봉읍)인 성산(현고성의 교후동에 은거하니 그와 절친했던 목수 이청은 그의 충절을 기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일말성산 하처시 남채복견사문동』(내님 계시다는 성산이 어딘가 와서보니 남쪽에도 사문동(고려충신 72명이 은둔했던 고을이름)이 있었구나) .
전신 또한 선조의 고향인 강화도로 피신, 태종이 7차례나 소명했으나 이를 거절해 왕을 탄복케 했다한다.
이처럼 전씨 가문이 내리막길을 걷던 이조말기에 이르러 역사의 풍운아 전봉준을 만난다.
이망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 싹을 트게한 동학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전씨가문의 흥망성쇠의 맥락을 짚어볼 때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 하다. 그는 이 충공의 한사람인 전 악의 후손으로 전북 태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가 민란(민란)의 주모자로 처현 되자 동학에 입문, 접주(접주)가 되었다. 그리고 고부군수 조병갑이 백성의 고혈을 짜는 것을 보다 못해 이 땅에 최초의 민중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1895년 3월27일 관군에 붙들려 교수형에 처해진다.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문숭혼은 일제 (일제) 의 암혹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한다.
안창호 선생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적극적인 배일 (배일)운동을 벌였던 전덕기. 문화재보호로 애국을 실천한 전형필, 의병장 전덕원등이 그들이다.
한강에서 북악까지 제5공화국의 전장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은 2전년 전씨 문중이 낳은 최초의 국가원수.
전대톰령은 시조 환성군의 30세손인 전준의 후손이다.
전대통령도 정선
전준은 고려 공민왕 8년과 10년 두차례의 홍건적의난 때 이방실등과 같이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완산군에 봉해진 이물.
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장군과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제장군은 전대통령의 13대 단다. 전제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때 오산전투에서 적과 대항하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전대통령은 부친 전상우옹과 모친 김점문여사의 6남1녀중의 넷째 아들로 경남 합천군 율곡 이내천리에서 태어났다.『전대롱령의 집안은 옛부터 유가(유가)의 예법과 엄한 가퐁을 지켜온 명문가』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전대통령의 숙부 전상포씨는 영남유림의 명유(명유) 로 한학의 대가 (대가). 그는 고향마을 초계향교전교를 역임하면서 4백여명의 후학을 길러냈다.
전비용씨(전건설부장관·전공화당 당의장서리)와 전성천씨(전 공보장관)등은 해방 후 전씨문중에서 배출한 장관들.
고 전택보씨 (전 천우사 사장) 와 전중윤씨(삼양식품 그룹회장), 전응규씨 (청주방촌회장) 등은 재계에 우뚝 선 인맥들.
전택보씨는 생전에 신상(신상)이란 별명이 따라 붙었던 한국경제의 귀재. 보세가공수출의 창시자이기도한 그는 47년 천우사 사장으로 취임한 후 우리나라를 세계 제1의 합판왕국으로 성장시켰다. 현 사장 전현신씨는 그의 장남.
전중윤씨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인스턴트식품인 「삼양라면 붐」을 일으킨 식품업개의 선구자. 그는 61년까지만 해도 식품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생명보험회사 사장이 었다.그러던중『어느날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 죽을 사먹기 위해 수십명이 장사진을 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식량난을 절감,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의 국내생산을 착안했다』는 삼양식품설립동기는 재계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화.
전응덕씨 (삼양식품사장) 는 언론계에서 성장한 기업인. 그는 동양방송 초창기에 언론계에 투신해 동경특파원, 보도국장, 전중앙일보·동양방송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식품업계의 경영인으로 활약하고있다.
법조계에는 전병덕씨(서울고법원장) 전상석씨(대법원판사) 전우영씨(전 대법원 행정처장) 등이 있다. 전광용씨(서울대교수·국문학) 전봉초씨 (서울대교수·기악) 전규태씨(연세대· 국문학) 전해종씨(서강대·사학) 전상운씨 (성신여대 부총장) 등은 학계의 원로.
「자선남비」로 유명한 구세군 사령관 전능섭씨는 종교계에 우뚝 선 인물. 그는 구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65년만인 73년8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령관이 되었다.
글 김창욱기자 사진 장남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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