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금요일] 요동치는 에너지 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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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나이가 당긴 방아쇠가 세계 에너지 시장의 지형도를 바꿨다. ‘셰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텍사스의 석유 재벌 조지 미첼이다. 1990년대 중반 그가 개발한 셰일오일 시추 방법인 ‘수압파쇄(fracking)기법’은 미국발 ‘셰일 혁명’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스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미첼은 형과 함께 17세부터 유전에서 일했다. 텍사스 A&M대 석유공학과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운도 좋았다. 텍사스주 포트워트 근처에 사들인 땅이 노다지였다. 13차례 유정을 파서 연속으로 기름이 나왔다. 포트워트의 ‘바넷 셰일유전’에서 처음 도입한 프래킹 기술은 북미 셰일업계로 퍼져나갔다.

2012년 3월 미국 텍사스주 엔시날 인근의 이글 포드(Eagle Ford) 셰일 유전 지대에서 근로자들이 파이프를 연결하고 있는 모습. [블룸버그]▷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셰일오일(또는 가스)은 진흙이 쌓여 생성된 ‘셰일(Shale)’ 암석층에 녹아 있다. 지하 깊은 곳에 넓게 퍼져 있다 보니 땅 아래 직선으로 구멍을 뚫어 뽑아내는 전통 방식(수직 시추)으로는 생산이 어려웠다. 미첼은 물과 모래, 화학약품을 섞은 혼합액을 고압으로 분사해 암석을 부수고 셰일오일이나 가스를 분리해내는 추출법을 개발했다.

 수압파쇄기법 개발은 새로운 개념의 ‘21세기 석유왕’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2013년 포브스가 평가한 미첼의 재산은 20억 달러였다. 문제는 있었다. 셰일오일(또는 가스) 채취 과정이 환경오염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미첼은 그래서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는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난해 7월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미첼은 환경오염이 덜한 채굴 기술을 개발해 달라며 환경보호재단에 거액(7억5000만 달러)의 재산을 기부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그가 눈을 감으며 걱정해야 할 것은 환경이 아닌 에너지 시장의 운명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셰일 혁명이 세계 에너지 시장을 ‘죽음의 계곡(장기 저유가 국면)’으로 몰아넣고 있어서다.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유가로 인해 에너지 시장은 탈선의 위기를 맞았다. 지난 6월부터 하락한 유가는 최근 5년4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다. 13일(현지시간) 전자거래에서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79.94달러에 거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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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가 떨어지면 셰일오일(또는 가스) 개발 이득이 없어진다 . 기술적 어려움으로 셰일오일 채굴비용은 천연가스나 원유 채굴 보다 많이 든다. 보통 셰일오일 생산업체는 이윤의 약 50%를 건설 및 장비 구입 비용에 사용한다. 유정 개발비용도 통상 유정 1개당 300만~1200만 달러가 들어간다. 이 때문에 유가가 어느 정도 받쳐줘야 채굴비용을 뽑고 수익을 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신흥국 수요가 늘며 급등한 유가가 수익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미국이 셰일오일 생산량을 늘리며 기름값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유가가 떨어지니 굳이 셰일오일을 개발할 필요성이 줄어든 것이다. 셰일오일 개발로 낮아진 석유 가격이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묘한 상황이 온 것이다.

 미 에너지정보국(EIA)에 따르면 미국의 셰일오일 매장량은 580억 배럴이다. 러시아(750억 배럴)에 이어 세계 2위다. 2006년 31만 배럴에 불과하던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량(하루 평균)은 2013년에는 348만 배럴로 급증했다. 미국 석유 생산량의 45%,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4%에 달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 등은 향후 2~3년 안에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산유국이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세계 경제 둔화로 원유 수요가 줄며 유가가 떨어지면서 게임의 룰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치킨게임에 돌입했다. 미국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의 ‘에너지 러시’ 보고서는 “OPEC이 의도적으로 혹은 회원국 간 의견 조정의 실패로 산유량을 제한하지 못해 유가가 하락하면 미국의 셰일오일 등 고비용 구조의 유정은 폐쇄될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셰일오일 등으로 위협받던 OPEC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셰일산업을 고사시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는 설명이다.

 IEA는 셰일오일 생산 업체가 견딜 수 있는 유가를 배럴당 80달러 선으로 본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인 우드 매킨지의 파니 가데 애널리스트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유가가 배럴당 90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업체의 30~60%가 초과지출을 하게 되고 배럴당 80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대부분의 업체가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미 여파는 나타나고 있다. 인베스터스 비즈니스 데일리는 미국의 주요 셰일오일 업체가 사업 축소를 고려하거나 자본 투자를 재조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산체스 에너지는 내년도 자본 지출을 11억~12억 달러에서 9억 달러 수준으로 낮췄다.

사우디는 승리의 예감에 쾌재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에너지 위기의 전조가 될 수 있다. 에너지는 투자와 생산의 시차로 인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란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공급 과잉이나 수요 초과에 따른 가격의 변동성이 에너지의 숙명이다.

  현재와 같은 가파른 유가 하락은 셰일오일이나 오일 샌드, 심해 유전 개발 등 고비용의 비전통적 원유 생산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떨어뜨려 사업을 위축시킨다 . 기존의 원유 채굴이든, 셰일오일 개발이든 저유가 시대에는 새로운 투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공급 감소를 피할 수 없고 원유 가격이 다시 폭등하는 수퍼 사이클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IEA는 새로운 에너지 파동을 불러올 복병이 셰일오일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현옥 기자

◆셰일오일=작은 진흙이 뭉쳐져 만들어진 퇴적암인 셰일 암석층에 셰일가스와 함께 함유된 석유다. 지층에 고여 있어 수직 시추로 채굴할 수 있는 전통석유와 구분해 비전통석유로 부른다. 2000년대 미국에서 수평시추법(수직으로 구멍을 뚫은 뒤 지하에서 수평으로 채굴)과 수압파쇄법 등 고난도 굴착 기술이 개발되며 생산 혁명이 일어났다. 탄소 함량이 높고 황 함량은 적은 경질유로 분류돼 타이트 오일(tight oil)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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