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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에게 들려준 「6·25」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올 봄 국민학교에 입학한 큰아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가방을 메고 들어서기 바쁘게 묻는다.
『엄마, 6. 25때는 반찬이 아무것도 없었나요?』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학교에서 바른생활 시간에 선생님께서 6. 25 얘기를 들려주셨다고 한다.
『우리 선생님네 엄마랑 동생들이 주먹밥하고 장아찌만 잡수셨대요』하면서 엄마는 어떠했는지 얘기해달라고 조르지만 갓 돌 지내고 겪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여 들려주어야 할지 잠시 머뭇했다.
경찰관이 되길 원하는 아이한테 주변의 어른들께서는 『하필 경관이냐』며 다른 아이들처럼 과학자나 대장이 되겠다 하라며 달랠 때도 몇번 있었지만 아이는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경찰관 소리를 곧잘 했으며 가끔 서울 외갓집에 가면 『왜 외할아버지는 삼촌처럼 생겼고(젊다는) 지금은 없느냐?』며 40여년 전 사각모를 쓰고 찍은 청년시절의 외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의아해하곤 했는데 이번 기회에 외할아버지와 6. 25와, 그리고 경찰관도 얼마나 자랑스런 나라의 일꾼인가를 자세히 들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친다.
6·25가 터지고 공산당이 쳐들어왔을 때 외할아버지는 훌륭한 경찰관이셨는데 남쪽으로 피난가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뒤쫓아온 공산당과 싸우시다가 지금의 여의도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비교적 듣기 쉽게 얘기책을 읽듯 들려주었다.
한참동안 응, 응 하며 듣던 아이가 『아!』 길게 소리내며 감탄하듯 손뼉을 치더니 『외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선생님이 피난을 잘 가셨다가 지금 우리반 선생님이 되셨구나』하며 이 다음 자기가 커서 경찰관이 되면 공산당과 싸울 수 있겠느냐고 한다.
글쎄, 그때까지도 우리가 공산당이란 말을 입에 담고 지낸다면, 지금은 고층건물만이 들어섰지만 그때는 너른 땅콩밭과 비행장이 있던 여의도 산기슭 중턱에 자리한 아버님 묘 앞에 하얀 소복으로 흐느끼시던 어머니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그때까지 간직하셔야 하는가?
한시간여 마주앉아 들려준 6·25를 일곱 살 머리의 아이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경찰관이셨던 외할아버지처럼 아이의 뜻대로 경관이 되거나 이 엄마가 원하는 대로 교육자가 되더라도 사회가 절실히 요구하는, 우리 민족을 내 가족처럼 아낄 줄 아는 인품을 갖추어 성장한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욕심이려니 한다.
숙제를 끝낸 아이가 활기롭게 뛰어나간 후 창밖 깨끗한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지난해부터 병고에 시달리시는 엄마가 건강을 되찾으시도록 힘을 주세요』하며.

<강원도 강릉시 임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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