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다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제는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싶게 힘들고 어려운 때는 돌아가신 분은 원망도 많이 했읍니다. 이렇게 짐을 많이 남겨놓고 떠나가면 나는 어떡하느냐고 한탄도 많이 했지요.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는 행여 마음을 다칠까 내색하지 않았읍니다.』
대한전몰군경 미망인회(회장 안목단)가 주는 제4회 장한 어머니상 특별상 수상자로 뽑힌 한귀용 여사(63). 그는 6·25때 육군 소위였던 남편 이은귀씨가 전사한 후 갖은 고초를 겪어가며 혼자 손으로 5남매를 훌륭히 키워 사회에 진출시킨 공으로 상을 받게된 것이다.
50년 6·25전쟁이 터지기 하루 전날인 24일 토요일, 당시 서울용산 근처의 부대에 근무하던 남편 이 소위는 주말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미아동 집으로 돌아왔다.
일요일 아침 모처럼 가족과 함께 밥상을 받고있는데 느닷없이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헌병이 뛰어 들어왔다.
『부대에 급한 일이 생겨 그 양반을 데리러 왔다고 하더군요. 아침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읍니다. 그날 무척 비가 내렸어요. 군복위에 비옷을 걸쳐입고 빗속으로 떠나가던 뒷모습을 본 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읍니다.』
당시 한씨의 나이는 한참 젊은 30세. 위로는 70세의 시아버지가 계셨고 슬하에는 당시 11세짜리 큰딸 옥주씨를 비롯하여 9세, 6세, 3세, 1세의 졸망졸망한 4남1녀가 있었다.
이들 모두가 한씨 혼자 손으로 돌봐야할 가족들이었다.
『피난지 용인에서 시아버지가 세상을 뜨셨읍니다. 그때부터는 정말 의논 한마디 할 사람이 없는 채 옥수수장사, 떡장사, 사기그릇장사 등 닥치는 대로 했읍니다. 수복 후에는 집장사도 했어요. 그날그날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하니까 고독과 외롭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읍니다.』
전쟁이 터진지 만 3년 후 수복해온 서울의 미아동 집에서 정식으로 남편 이 소위의 전사통지를 받았다. 용인에서 농사를 짓다가 「애들을 모두 농사꾼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서울 집을 찾아든 직후였다. 그때 한씨는 정릉천변에서 「마전빨래」(광목 등을 빨아 표백하는 삯빨래)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양잿물을 쓰는 삯빨래와 한겨울에 땔감을 구하기 위한 나무하기 등으로 손은 모두 해지고 피가 나 갈고리보다 더욱 험해졌고 손톱은 닳아 손톱깎기를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50년대 후반부터는 상이군경 유족회가 운영하던 피복회사에 취직되어 식량배급을 받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살이가 나아졌다.
5·16후에는 전매청에 취직이 되어 수위를 거쳐 일반공원으로 일하다 74년 정년퇴직했다. 어려운 생활중에도 4명의 아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시켜 큰아들 정주씨(41·금성 키폰판매사 대표)는 둘째 영주씨(39)와 함께 사업을 한다. 세째아들 봉주씨(35)는 대한통운 대리로, 네째아들 덕주씨(34)는 고려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5남매가 모두 결혼 슬하에 손자손녀만도 모두 12명.
현재 한씨는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있는 세째 봉주씨 댁(서울 강동구 잠실아파트4백10동1백3호)에 머물면서 살림을 돌봐주고 있다. 따라서 주말이면 화목한 5남매는 자녀들을 데리고 어머니 계신 곳에 모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루 3∼4시간을 잘 정도로 바쁜 속에 일에 골몰하느라 외롭다, 슬프다는 생각도 못했읍니다.
주일이면 열심히 교회에 나가 신앙에 의지했던 것도 큰 힘이 되었읍니다.』 30년째 미아동 한성성결교회에 나가는 독실한 신자. 그의 지금 소원은 자신의 퇴직금을 털어 78년 세운 큰아들의 사업이 잘되는 것 뿐이라고 한다. <박금옥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