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교과서라도 잘 만들면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고정애 정책사회부 기자

16일 "아주 조금만, 정말 조금만 도와줄 순 없나요"로 시작하는 e-메일을 받았다. 경기도 분당중 3학년이라고 소개한 학생으로부터였다.

사연은 이랬다. "방학이 되어 혼자 공부를 하려 합니다. 고등학교 과정을 봤는데 교과서로는 무리겠더라고요. 설명이 없어 교과서 자체가 주입식이더군요. 숨겨진 이야기를 곁들이면 수학도 재밌을 것 같은데…. 시중의 참고서를 봐도 혼자 공부하기는 힘든 듯하고요. 제 머리를 이런 '공교육'에 썩히고 싶지 않아요.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혼자 학습하고 싶은데…. "

그의 부탁은 간단했다. 16일자 본지 1.5면에 소개된 '명지고교형 학습교재'를 구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교재는 명지고가 국어.영어.수학 등 주요 6개 과목별로 교과서.참고서.전문도서 등의 내용을 400~700쪽짜리 네 권 분량으로 묶은 것이다. 풍부한 설명과 다양한 난이도의 예제까지 곁들여 명지고 학생들 사이에서 "과외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거나 "심화학습을 학교 교재로 한다" 는 '기이한' 평가를 받고 있는 교재다.

중3뿐 아니었다. 현직 고교 국어교사라고 밝힌 이는 "좀 더 잘 가르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다"며, 강원도 춘천의 한 고1 학부모는 "대안을 제시받는 것 같아 마음이 후련하다"며 같은 부탁을 했다.

명지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수백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한 출판사 사장은 "교재를 출판하고 싶다"며 다짜고짜 교장실에서 죽쳤다고 한다.

요즘 교육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3불(不) 정책(본고사, 기여입학제, 고교등급제 금지) 등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국립대 총장이 맞서는 모양새다. "기득권 벽 쌓기"라거나 "'분권과 자율'을 앞세우면서 경쟁이나 수월성 추구,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논리에는 문제가 있다"는 공방도 심상찮다. 공교육의 장래를 위해 중요하고 꼭 필요한 얘기들이다.

그러나 이런 거대 담론 속에서 '기초를 다지는 일'이 무시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학생들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기초 중의 기초다. 명지고 교재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정부가 이런 기초적인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줬다.

독자에게 이렇게 사과의 답신을 보냈다. "명지고 측에선 순수한 교내용 자료이며 계속 보완이 필요해 외부인에겐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정작 사과해야 할 당사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두 번째 든 의문이었다.

고정애 정책사회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