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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클릭] 법 대로 주민회장 뽑으라더니 … 심판은 안 보는 강남구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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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한 주민이 각 동 엘리베이터 앞에 붙어있는 현(現) 회장 입장을 담은 안내문을 읽고 있다. 이 아파트는 올 2월 입주자대표회장 선거를 둘러싼 잡음으로 지금까지 전?현직 회장 간에 다툼을 벌이고 있다. 법에 따라 직선을 했지만 이후 벌어진 갈등에 대해선 구청과 시청 모두 수수방관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지난달 30일 오후 8시 서울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 관리동 2층 회의실에선 고성이 오갔다. 각 동 대표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정기 입주자대표회의 자리였지만 정확히 7분만에 회의가 끝났다.

 “이런 회의가 어딨어!” “이럴 거면 입주자대표회를 아예 해산시켜야지, 원.” 

 소동은 동 대표 자격으로 이날 회의에 참석한 전 입주자대표회장 정모(66)씨가 입주자대표회장 자리에 앉으면서 시작됐다. 정씨는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회장 당선증을 받지 못한 현 회장을 회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재선거 전까지 내가 회장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현 입주자대표회장인 도모(73)씨가 발끈했고, 급기야 양측 지지자 간 충돌로 경찰까지 출동한 거다.

 문제의 발단은 올 2월 입주자대표회장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주택법 시행령 개정으로 500세대 이상 아파트 단지는 무조건 직선으로 회장을 뽑아야 하기에, 주민이 원하든 말든 이곳 역시 입주민 직접 투표로 회장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직선에 들어간 비용은 계획상 금액 550만원을 훌쩍 넘는 1000여만원으로, 주민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대리투표 의혹이 제기된 데다 후보 비방 사태 등이 벌어졌고, 구현대아파트 선관위는 결국 지난 8월 당선 무효와 재투표를 권고했다. <江南通新 3월 5일, 12일, 19일자 참조>

 그러나 새로 당선된 도씨 측은 선관위가 정씨 측근으로 채워져 있어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이를 무시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최근에는 선관위 해촉을 위한 주민 서명을 받고 있다. 전 회장이자 선거에서 도씨와 맞붙었던 정씨는 지난달 아파트 관리비 등 80여억원이 입금된 통장의 출금을 막아버렸다. 당장 관리사무소 직원 월급을 못 주게 되자 도씨 측은 부랴부랴 은행을 설득해 일단 월급을 준 후 이 문제 등을 논의하겠다고 이날 입주자대표회를 소집한 것이다.

  지난 2월 사실상 회장직에서 물러난 정씨에게 어떻게 이런 권한이 있을까. 그건 통장이 정씨 명의로 돼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아파트 사업자 등록증 대표도 정씨로 돼 있다. 원래 새 회장에 뽑히면 구청에 신고해 관리비 통장 명의와 사업자 등록증상 대표자 이름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구청은 도씨가 당선증이 없다는 이유로 신고서를 반려했다. 그렇다고 정씨 손을 들어준 것도 아니다. 당선증이 없어 대표자 명의 변경도 안 한 사람이 8개월 동안 회장직을 해오고 있는 데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법적 절차에 따라 선거가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명백한 문제가 벌어졌는 데도 구청이 모르쇠로 일관하며 갈등만 키운 꼴이다.

 이처럼 선거일로부터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사태 해결은커녕 오히려 ‘아파트판 막장 드라마’를 연일 써나가고 있다. 심지어 지난달 말엔 선거관리위원장 서모씨가 도모씨를 비롯해 아파트 관리소장 등 4명을 사문서 위조와 업무 방해 등 4가지 죄목으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데는 강남구청과 서울시의 나몰라라식 태도가 한몫했다. 그래서 주민들 사이에선 회장 직선 폐지론과 함께 강남구의 무책임을 비난하는 얘기까지 함께 나온다. 법에 따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한 직접 선거가 주민 편의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주민 간 갈등만 유발하는 데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구청 측이 방관만 하겠다면 차라리 선거를 없애라는 주장이다.

 강남구는 난감해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입장이다.

 강남구는 지난 4월과 6월 두 차례 변호사·교수 등 외부위원 6명으로 구성한 소통자문위원회의를 열어 이 사태를 논의하긴 했다. 정씨와 도씨, 그리고 현 선거관리위원장 서씨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재선거가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놨다. 그러나 재선거는 없었다. 

 강남구 주택팀 관계자는 “위원회 결정은 강제 권한이 없는 권고 사항일 뿐”이라며 “주민이 해결할 몫”이라고 말했다. 갈등을 빚는 주민 사이에 답을 찾지 못해 구청에 도움을 청한 건데 구청은 “주민이 알아서 하라”는 입장만 되풀이하는 셈이다.

 서울시도 비슷한 입장이다. 시 공동주택관리지원센터 관계자는 “1차 지도·감독권자인 구청이 담당할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다른 평범한 주민이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시나 구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관련 규정에 해결 실마리가 없는지 빨리 찾아봐야 한다”며 “만약 해결할 조례·규칙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기초·광역 자치단체와 의회가 머리를 맞대 만드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허만형 중앙대 공공인재학부(행정학 전공) 교수도 “시·구청이 직접 나서거나 중재자를 찾아 갈등을 조정할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라며 “일부 주민 간 문제라 해도 갈등이 지속적으로 커지면 나머지 주민도 피해를 보게 되므로 기초자치단체가 해결해야 할 몫”이라고 말했다.

글=조한대 기자 chd@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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