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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서방 불변"선언」…"사우디 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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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할리드」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급서로 인한 주변정세의 변화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전왕의 행진을 계속하고 전왕의 희망을 추구하며 전왕의 계획을 완성시키겠노라』 고 한 「파하드」신임국왕의 첫 칙어가 말해주듯 「할리드」전왕의 모든 것을 그대로 계승할 것 같다.
「파하드」국왕은 국가수비대사령관이며 제2부수상 「압둘라」왕자가 황태자 겸 제1부수상으로 승진함에 따라 공석이 된 제2부수상자리에 국방상「술탄」왕자를 임명한 것 외에는 현 내각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할리드」국왕은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아 왔기 때문에 세계최대의 석유왕국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하드」황태자의 손에 통치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격한 정책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그 때문이다.
변화가 있을 수 있다면 석유수출국기구(OPEC)주도 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교체됨에 따라 새로운 권력구조가 안착될 때까지 OPEC의 장기석유전략 수립이 일시 중단될 것이라는 것 정도다. 그러나 이것마저 「파하드」왕이 이미 석유가 정책수립에 깊이 간여해 왔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파하드」왕은 선왕 「할리드」밑에서 내정보다는 외교에 전력했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는 「할리드」통치아래서 보다 국제무대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낼 것 같다.
「파하드」왕은 친미·친 서방 노선을 걸으면서 중동진출을 시도해온 소련에 맞서왔고 이란 「호메이니」옹의 혁명수출에 맞서 작년 5월에는 쿠웨이트·오만·바레인·카타르·아랍에미리트와 함께 페르시아연안 6개국 협력협의회 (GCC)를 창설했다.
현재 43개국 이슬람협의회기구 (ICO)의 의장직을 맡고 있는 「파하드」신왕은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후원자로서 재정원조를 해주고 있는가 하면 작년 8월에는 중동평화8개항을 제안해 세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파하드」안이라 불리는 이 8개항은△이스라엘의 점령지 무조건 철수△모든 국가의 상호승인△팔레스타인 독립국가창설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작년 7월과 최근의 레바논사태를 휴전으로 이끄는데도 PLO의 대변자로서 중재역할을 맡아 PLO의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
최근 레바논 사태 때는 「레이건」미 대통령과「아라파트」PLO의장사이를 긴급전화로 중재해 극적인 휴전을 하게 했다.
바로 그의 이러한 아랍권에서의 위치는 과거「파이잘」국왕이 차지했던 영향력보다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황태자를 계승한 「압둘라」왕자는「파하드」왕이 진보주의적이라면 보수 전통적이다. 아직 국제무대에서는 이렇다할 면모를 보인 적이 없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종교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다. 「파하드」의 이복동생인 「압둘라」황태자는 지난 7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제3인자 자리인 제2부수상에 임명되었는데 「할리드」국왕이 정력적인 「파하드」황태자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세웠다.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를 세운「압둘·아지즈」초대 국왕은 베두윈 족 출신으로 아들을 모두 36명 두었다.
75년 조카의 손에 암살된 「파이잘」국왕, 고「할리드」국왕, 「파하드」국왕, 「압둘라」황태자 모두가「아지즈」국왕을 부왕으로 하는 이복형제들이다.「아지즈」왕은 통일전쟁 중 북쪽 하일 지방을 정복한 직후 항복한 왕자들을 리야드로 불러 자기 궁전에 살게 해주고 죽은 왕족들의 세 미망인은 자기 가족들로 만들어 한 명은 동생과, 한 명은 아들과 결혼시키고 한 명은 자기 후처로 삼았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의 8번째 아들 「압둘라」이며 바로 신임 황태자다.
「파하드」국왕은 야심적이고 정력적이었지만 이복형 「할리드」국왕 앞에서는 신하로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대처」영국수상의 에피소드는 유명한 것으로 81년 4월 「대처」가 리야드를 방문 중「파하드」황태자와 만나고 나서『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입니까, 말 한마디 못하던데요』라고 그녀의 보좌관에게 「파하드」의 인상을 얘기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만났을 때 「파하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바로 첫 번째 때는 「할리드」왕 앞에서였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대처」는 미처 몰랐던 것. 그만큼 전왕의 체제 아래에서 황태자로서 지켜야할 분수를 알고 그대로 실행했었다.
「파하드」왕은 「아지즈」부왕의 여러 부인 중 하나인 「하사·수다이리」를 어머니로 하는 7형제의 맏형이다. 이 형제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권력핵심체가 되고 있는데 국방상·내무상·리야드 시장 등 국가요직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어머니의 형제라는 혈연으로 뭉쳐 지금도 매주 한번씩 누이 집에 모인다. 이모임은 가족모임이라기보다 오히려 비공식 정책회의성격을 띠기 일쑤.
그래서 서방외교관들은 7형제를 『수데이리·세븐』이라 부른다.
진보적인「파하드」국왕은 그가 황태자가 되고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화를 지휘해왔다.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화정책은 더욱 박차가 가해질 전망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더욱 가까워질 소지가 많다. 건설분야에서의 협력은 전망이 밝다 하겠다.
다만 신임황태자 「압둘라」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압둘라」의 견제가 어느 정도까지 미치느냐가 변수로 남는다.<이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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