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새 소설 '피를 마시는 새' 펴낸 판타지 작가 이영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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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어느 인터넷 카페에 실린 '이영도를 체포합니다'란 제목의 글. 거기서 밝힌 이영도의 죄목이다. 많은 이를 궁핍하게 한 죄, 학생들의 시험을 망친 죄, 국가의 허락없이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 놓은 죄.

1997년 컴퓨터 통신 하이텔에 '드래곤 라자'를 연재한 이래 이영도(33.사진)씨는 수백만 매니어에 의해 신격화된 존재다. 앞서 사람을 궁핍하게 한 죄라는 건 그의 책을 사보느라 들인 돈을 말하는 것이고, 밤새 그를 읽다 시험을 망친 학생과, 죽었다 벌떡 일어나는 서양귀신 좀비처럼 밤마다 그 때문에 벌떡 일어난 이들을 가리킨다.

8권짜리 신작 '피를 마시는 새'(황금가지)가 나왔다. 역시 가상의 공간에서 인간이 아닌 종족들이 벌이는 서사를 담았다. 경남 마산에 사는 그를 불러 만났다. 뚱한 표정에서 판타지를 이해 못하는 보수 언론에 불려나온 불편한 심사가 읽힌다. 하여 도발로 시작했다. "판타지도 소설이냐!" 성이라도 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답변이 나왔다.

"그럼 아니냐. 서사를 다루는데 소설이 아니면 뭐냐. 왜 문단은 스스로 영역을 좁히려 드느냐. 엄청난 수의 독자를 거느린 판타지.추리.밀리터리.로망스의 장르가 소설이 아니면 뭐냐? "

-사실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문단의 엄숙주의는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

"문단 어쩌고,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여하튼 난 나를 작가가 아니라 타자라고 부른다. 작가 하면 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컴퓨터 자판을 때리는 놈(打者)으로 생각한다. 이 편이 훨씬 편하다"

-많은 작가가 자신의 경험에서 소재를 따온다. 당신은 어떠한가.

"경험이다(이 때 그는 무척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끼는 것이 있다면.

"달래. 내 컴퓨터 이름이다(옛날 통신시절, 16비트 컴퓨터를 쓸 때, 하도 느려서 '달리 16비트냐'부르다 '달래'가 됐단다)."

만나보니 그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다만 가리는 분야가 있었다. 문예지 문학은 사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철학.역사.과학을 좋아했다. "들뢰즈는 알겠는데 화이트헤드는 도통 쉽지 않다"고 했다. 앞서 경험이라고 한 건 엄청난 독서량의 다른 표현이었다.

글=손민호, 사진=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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