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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담양 전씨|제자: 초정 권창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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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엇을 대대로 전가해야할 것인가. 충효와 인의와 예절이 아니던가. 인간에 무슨 보물이 이보다 더 할 손가. 세상 사람이 고루 써도 바닥 나지 않을 것을…. 공과 세만 믿다보면 흉한 일 다가오고 도 닦아 공부하면 좋은 일 쌓이느니라.』
담양 전씨가 낳은 고려말의 석학 전조생이 후손들에게 가훈으로 남긴 유명한 『계자시』의 한 귀절이다.
전조생은 고려 충혜왕이 어린 두 왕자의 교육을 의탁했던 당대의 명신이요 대문장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높은 학식과 덕망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사양, 관향인 담양에서 송죽을 벗삼아 살았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자 전조생은 불사이군의 충절로 깊은 산골에 피신,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

<당파에 모두 초연>
이렇듯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부귀와 공명을 탐하지 않은 대쪽 같이 곧은 선비의 기개가 곧 담양 전씨의 기질』이라고 전신호씨 (담양 전씨 세록 편찬 회장)는 말한다.
때문에 『담양 전씨 일문은 이조 5백년의 서슬 퍼렀던 사색 당파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곧은 선비의 지조를 지키며 그 맥을 오늘에 이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1975년 대한민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담양 전씨는 2만2천4백21가구에 약 20만명. 우리 나라 2백49개 성 가운데 44번째를 차지한다.
담양 전씨는 원래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속설이 있다. 원시조는 진나라의 공자 전완이요 「전」을 성으로 삼은 것은 봉 받은 고을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건너온 인물은 전완의 후손이요 제나라의 마지막 왕인 전횡. 그는 중국 천하를 통일한 한의 장수 유방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자 심복 부하를 이끌고 동해의 고도 (현 어청도로 추정)로 망명, 그곳에서 자결했다 한다.
그러나 이 얘기는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
우리 나라의 전씨의 시조는 충원공 전득시. 그는 고려 중엽 때 전남 담양에서 출생, 의종 때 현량문과 (도의와 충절이 높은 선비를 선발하는 과거)에 오른 인물로 후에 담양군에 봉해진다.
전씨의 관향인 「담양」은 봉 받은 고을 이름.
담양군 후대에 와서 우리 나라의 전씨는 연안파, 남양파, 하음파, 영광파 등 10여파로 분류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전씨는 관향을 담양으로 하는 한 할아버지의 자손으로 단일본』이라고 전의배 옹 (78·담양 전씨 화수회 고문)은 말한다.
담양군의 후손은 6세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7세에 이르러 녹생 (호·번은)·귀생 (호·내은)·조생 (호·경은)의 3형제가 났으니 이들이 곧 유명한 『전씨 삼은』이다.

<두 왕조 못 섬긴다>
전녹생은 고려 공민왕 때의 명현. 그는 문신이면서도 무예에 뛰어나 문무전재의 칭을 들었는데 성품이 강직하여 여말의 간신 이인임을 목 베일 것을 상소하다 도리어 그들의 일파에 죽음을 당한다.
그의 아우 귀생 또한 문장과 학문이 깊은 당대의 석학. 그는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새 왕조를 세우자 절해 고도로 들어가 절개를 지킴으로써 막내 동생인 조생 (「계자시」의 저자)과 함께 두문동 72 현록에 오르니 세상 사람들이 이들 3형제를 『전씨 삼은』이라 불렀다한다.
『이같은 선비로서의 충절과 기개 때문에 전씨 가문은 이조 초기에는 내리막길을 걷지요. 전씨와 전씨, 그리고 옥씨 등 3성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인 「왕」씨였다는 속설도 있읍니다. 이씨 조선의 건국과 함께 「왕」씨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자 화를 모면키 위해 「왕」자 주위에 「=」, 「인」, 「'」 등을 붙여 성을 바꿨다는 거예요.』
전신호씨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전·전·옥 등 3성은 고려 때 흥했다가 이조 초기에 똑같이 쇠퇴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이같은 사랑방 설화가 구전된 것 같다』고 풀이한다.
한말 성리학의 거유 전우는 전씨 문중을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그는 고종 때 순흥부사·중추원 참의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나 이를 거절하고 한말의 풍운 속에 초야에 묻혀 고고한 학자로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는 을사조약 (1905년)이 체결되자 매국의 역신을 타도하는 상소문 『청참오적』을 수차례 올렸으나 뜻이 이뤄지지 않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고 서해의 고도 북왕등도로 피신, 여생을 보냈다한다.

<문과 급제자 27명>
이밖의 인물로는 인조조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전공을 세우고 판관에 오른 전세록, 병자호란 때 자모 산정을 사수한 명장 전천 등이 있다. 전천은 우리 군사가 남한 산성의 전투에서 청의 군사에 참패한 후 조정에서 청의 요청에 따라 군사 5천명을 지원병으로 파병할 때 의주까지 갔다가 죽음으로 항거,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다.
고려와 이조를 통틀어 전씨 문중은 대제학 2명, 정승 3명, 판서 22명, 장군 3명 등을 낳았고 이조 때 총 27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독 립투사 전명운은 일제의 암흑기에 전씨 문중의 맥을 이은 대표적인 인물. 그는 1905년 미주 지역 독립 단체인 「공립 협회」 회원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1908년3월21일 고종 황제의 외교 고문이자 친일파 미국인이었던 「스티븐즈」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격분, 동지인 장인환과 함께 「스티븐즈」를 저격, 살해한 후 미국 경찰에 붙잡혀 8년의 옥고를 치른다.
늘봄 전영택은 김동인·주요한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창간했으며 『화수분』 등의 작품으로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소설가.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한 그는 일제 말 배일 설교로 4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붓을 꺾으면서 『꺾어라 꺾어라 내 혼도 꺾이누나 (시「벽서」 중에서)』며 나라 잃은 울분을 토했다.
해방 후 전씨 문중에서는 선비의 가문답게 많은 석학을 배출한다.
전풍진씨 (공박·전 광운 공대학장), 전광우씨 (미 테네시 주립대 부교수), 전산초씨 (간호 협회신보 사장·전 연세대 간호 대학장), 전뇌진씨 (홍익대 교수·조각), 전대희씨 (공박·해양대학원장) 등이 학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
풍진씨는 대한민국 「박사 제1호」. 응용 화학계의 월로인 그는 53년 서울대 교수 재직 때 부산 피난 학교서 학위를 받았는데 우리 나라 제1호 박사여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학위증을 수여했다 한다.
광우씨는 이론 생믈학계의 석학. 그는 지난 70년 뉴욕 주립대 이론 생물학 센터 소장 「대니얼」 박사 팀과 함께 인공 세포 합성 실험을 성공시켜 세계에 충격을 던져줬다.
전봉덕씨 (변호사·한국법학원장), 전용성씨 (의박·변호사·65년 서울지법판사), 전수안씨 (서울지법관사) 등은 전씨 문중이 배출한 유명 법조인들.
봉덕씨는 40년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후 서울 변호사회 회장, 변협 회장 등을 역임한 법조계의 원로.
용성씨는 18년 동안 의사로 활약하다가 고등고시에 도전, 7번 응시한 끝에 최고령자로 합격해 「육전칠기의 법관」으로 화제에 올랐던 인물이다.

<번역가 전혜린도>
짧은 생애를 불꽃처림 살다간 여류 번역가 전혜린씨 (전 성균관대 교수·독일 문학)는 변호사 전봉덕씨의 장녀. 「1세기에 한번 나올 희귀한 천재」로 불려진 그녀는 지난 59년 한국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서독 뮌헨 대학을 졸업한 후 성균관대 등에서 독문학을 강의하다 32세에 요절했다. 그녀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주옥같은 문장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전풍자씨 (국립 나병원 의사)는 나병 환자를 위해 일생을 바친 소록도의 상록수. 그녀는 25세에 동경여자 의과 대학을 졸업, 산부인과를 경영하다가 지난 73년 소록도로 들어가 나환자의 재활을 위해 헌신해 왔다. 지난 81년 풍자씨는 한국 여성 단체 협의회가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을 기려 제정한 18회 용신 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호관씨 (여자 배구 대표팀 감독)는 전씨 문중이 낳은 명 배구 감독.
그는 스파르타식 강훈으로 소속팀을 승리로 이끄는 한국 여자 배구의 사령탑.
이밖에 전씨 문중에서는 전만중씨 (3, 4대 국회의원) 전석봉씨 (5대 국회의원) 전영석씨 (4대 국회의원) 등 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지명 인사>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지명 인사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병식 (대구지법판사) ▲전용태 (서울지검검사) ▲전병무 (대전지검검사) ▲전성환 (변호사) ▲전경배 (공학박사·한양대교수) ▲전천수 (전 경남도교육감) ▲전병훈 (보사부사회국장) ▲전용신 (서울대 교수) ▲전상기 (주식회사 예능 대표) ▲전용욱 (한학자) ▲전봉훈 (전 연합 신문 이사) ▲전효수 (대동 상호 신용금고 대표) ▲전기수 (전 부산 동래 경찰서장) ▲전계원 (대법원 등기 과장) ▲전만수 (수문당 인쇄 대표) ▲전시영 (신전 산업 대표) ▲전용순 (동양화재 부산 소장) ▲전길수 (삼부 주택 공사 대표) ▲전유석 (영남 기업 대표) ▲전점수 (의학 박사·현대의원장) ▲전철수 (미성건설중역) ▲전대희 (효성여대 교수) ▲전일순 (논산 부군수) ▲전병곤 (전남교위학무국장) ▲전근배 (제일 사료 상사 대표) ▲전해수 (조양 공업사 대표) ▲전춘서 (의학 박사·봉생 신경외과 원장) ▲전준철 (전 한은 감독 부원장) ▲전영환 (의박·한양대 교수) ▲전영복 (모 기관 부산 지부장) ▲전옥식 (광주 체신청장) ▲전병기 (대한 도서 용품사 대표) ▲전옥현 (부안서장) ▲전만수 (한국비료이사) ▲전창수 (동광 식품 대표) ▲전군준 (의박·성신의원장) ▲전갑수 ((주)풍전 대표) ▲전군현 (청주 주정 대표) ▲전용근 (전 대전 세무서장) ▲전병환 (대구 미도백화점 대표) ▲전용갑 (홍성 중·고 재단 이사장) ▲전관배 (전북대 농대 교수) ▲전기철 (건 담양읍장) ▲전병출 (새마을운동 경남사무국장) ▲전승리 (성악가·메조소프라노) <종친회 제공·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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