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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장 여인 사건 국회보고(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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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철희

<전과>1923년 9월1일 충북 청원군 오창면 탑리 288에서 부 이상섭, 모 김영념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현재 위 부모는 모두 사망하였으나 동생 이문희는 충북 청원군에서 농업에종사하고 있으며, 여동생 이충란은 정유택과 결혼하여 현재 충북 진천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음.
이철희는 1944년 일본 나가노 정보학교 입교시 정보원으로서의 신분조작을 위해 전과자로 처리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전과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부산 교도소에 보관·비치되어 있는 형 집행 원부 및 수형인 명부에 의하면 1943년6월19일경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원에서 1942년12월경 일본 동경(육본목)우체국에서 50원 짜리 우편환을 절취. 인출한 범죄사실로 절도·유가증권위조·동행사·사기죄 등으로 징역단기 1년, 장기 3년을 선고받고 김천 소년원에서 1년간 복역한 것으로 나타나 추궁한 결과 전과사실을 자백하였음.

<학력>l940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 소재 오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일본육군 나가노 정보학교에 입학하여 수료하였다고 하나, 위 전과사실로 미루어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 진위여부를 확인 중에 있음.
이철희는 1946년 우리 나라 육군사관학교 2기로 졸업 한 후,1947년3월 부산 동아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1949년3월 위 학교 2년 중퇴하고, 1951년3월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3년에 편입, 1952년3월 위 학교를 졸업하였음.

<경력>1945년 12월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946년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하면서 일본대학 중퇴로 학력을 조작하였고, 수회에 걸친 신원내사 과정에서도 교묘하게 전과 사실들을 은폐 한 채 지내던 중 특히 1961년 5·16혁명 때는 방첩 부대장으로 재직하였으면서도 기회주의적인 처세술로 계속 영전하여 197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으며, 1974년 중앙정보부 차장, 79년 유정회 소속 10대 국회의원으로 있었고, 1981년 8월에 대화산업주식회사의 회장에 취임.
이철희는 음흉한 2중인격자로서 자기의 출신성분을 부끄럽게 여기고, 전과사실이나 가족사항을 철저히 은폐하여 왔으며, 자기 모친상을 당하여서도 고향에 찾아간 적이 없고 성묘한 사실도 없었다.
▲장영자
1944년 10월25일 목포시 죽교동 374에서 부 장병준, 모 이화선의 3남4녀 중 3녀로 태어났으며, 큰언니 장성희는 현재 이규광의 처이며, 둘째 언니 장양자는 1939년 5월24일 병사하였고, 여동생 장현민은 현재 불란서에 거주하고 있으며, 큰오빠 장상율은 l980년11월15일 부인과 이혼하고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고, 둘째 오빠 장삼부는 1970년3월24일 사망하였으며, 셋째 오빠 장진혁은 현재 서울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음.

<범죄경력>1978년9월11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사실이 있음.

<학력>1953년3월 서대문 국민학교 4년에 편입하여 1956년2월 위 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계성여자 중학교에 입학, 1959년2월 위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9년3월 계성여자 고등학교 입학, 1962년2월 위 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4월 경기실업 초급대학 보육학과에 입학, 1964년 1월 위 학교를 졸업 한 후 1964년 3월 숙명여자대학교 교육학과 3년에 편입, 1966년2월 위 학교를 졸업.

<경력>1963년3월 첫 남편 김수철과 결혼하여 생활하다가 1977년5월 협의이혼을 하였으며 1976년 3월에는 세양에너지 주식희사를 창립하여 대표이사로 근무하고 1977년 3월 한중일보이사로 취임하였으며, 1977년7월부터 1978년8월까지는 고려제강주식회사 사장 홍종열과 두 번째 결혼생활을 하다가 협의이혼 한 후, 1980년6월부터 이철희와 동거하던 중 같은 해 국제불교도협의회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81년1월 전남 해남군 소재 대흥사에서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이철희와 결혼식을 가진 후 같은 해 6월에는 대화산업을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가 같은 해 8월 이철희에게 회장직을 넘겨주고 명예회장으로 취임하여 근무하여 오던 중, 1982년2월14일 위세를 과시하는 동시에 본 건 어음사기를 감행하는데 이용 할 목적으로 싸파리 클럽에서 이규광 등 하례객 1백20명의 참석 하에 2차로 이철희와 호화로운 결혼식을 거행.
장영자는 계성여고 학적부의 기재에 의하면 성적이 아주 불량하였을 뿐 아니라 준법정신이 희박하고 다변이며, 근면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그녀는 집념이 강한 반면에 병적일 정도로 과욕이며 ??시욕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고 이러한 성벽으로 결혼을 3회나 하게 되었음.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해외여행 관계
장영자는 l975년6월 일본 오끼나와에서 개최된 박람회 관람 차 도일한 사실이 있고, 이들 부부가 결혼 한 후 1981년 6월에 자유중국 불교신도협회 초청으로 대북을 방문하여 일본을 경유 귀국한 사실이 있으며, l981년7월에는 부부동반으로 미 앨라배마 주지사 초청으로 에너지생산실태 시찰차 도미한 사실이 있고, 1981년 9월 이철희 단독으로 한·중동합작은행 설립과 파리시장 조사명목으로 도불한 사실이 있을 뿐 아니라 장영자는 1981년 9월에 재미 아시아 실업인 단체초청 세미나참석 목적으로, l982년 2월에는 이규광의 차남 결혼식참석 목적으로 각 도미한 사실이 있으며 이어1982년 4월에는 이들 부부가 일본 불교도협회장 초청으로 도일한 사실이 있는 외에 이철희는 중앙정보부 재직 시 1962년부터 1978년까지 사이 13회에 걸쳐 미국 등지에 공무출장을 한 사실이 있음.
▲이철희의 여성편력
이철희는 그 동안 독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여배우 김모씨와 동거한 사실이 있고, 1975년 일본 출장시에 일본인 친구의 주석에 초청되어 만나게 되었던 일본여인「노시마·도미꼬」와 1976년까지 사귀면서 위 양인이 한국과 일본을 수 회 왕래하면서 정을 통한 사실이 있으며, 현 부인 장영자와는 동녀의 수양어머니 장대화 보살의 소개로 장영자와 교제하여 오다가 1980년6월 동거를 시작, 1981년1월 친척의 참석 하에 해남 대흥사에서 1차 결혼식을 한 후 같은 해 5월16일 혼인신고를 필하고 l982년 2월14일에는 이규광 등 하객l백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싸파리 클럽에서 2차로 호화로운 결혼식을 거행하였음.
▲이·장 부부의 2차 결혼식장에는 이규광을 비롯하여 현역 국회의원 7명, 전직 국회의원 2명, 전직 장관 1명, 그 당시 모 은행장·기업체 대표 등 1백20여명의 하객이 참석하였는데 자세한 명단은 그들의 명예를 위하여 공개하지 않겠음. 다만 의원들의 요청이 있으면 소관상위에서 밝힐 것 임. 결혼식에서 이규광은 가족 대표로서 두 사람에 대한 축복과 지도편달을 바라며 식장에 왕림해 주신 하객들에게 거듭 감사한다는 취지의 인사말을 했음.
또한 1982년 2월 중순 워커힐 별장에서 거행된 이철희·장영자 결혼식 피로연에는 위 이규광 외에 현직의원 3명과 그 당시 은행장 1명이 참석을 하여 저녁식사를 한 사실이 있음. 이철희 부부와 당시 참석하였던 일부 인사를 조사한 결과, 결혼식장과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하였던 의원들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은 없었음.
위 결혼식장에 기업대표 등이 화분을 보내 온 사실이 확인되었음.
◇이철희·장영자의 어음사기의 특징
▲이철희는 1975년 중앙정보부 차장 재직 중 중동을 방문 시 중동 오일달러의 국내 유치가능성울 타진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은 적이 있음을 기화로 1979년12월 유정회 국회의원직을 그만둔 후 한·중동 합작은행을 설립, 운영하거나 미국회사와 석탄가스화공장, 중장비합작공장, 탄광합작투자개발, 농지개발 등 해외투자사업을 경영함으로써 국내 정상급 재벌로 부상할 수 있다는 허황 된 꿈을 꾸어오던 중 1979년12월 장대보화 보살의 소개로 알게 된 장영자가 상당한 재력이 있고 고위층의 인척인 이규광의 처제라는 사실을 알고서 이를 이용하면 위 허황 된 꿈을 실현 할 수 있다고 속단한 나머지 장영자에게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 승낙을 받고 1980년 6월경부터 굳이 거절하는 장영자를 감언이설로 설득, 결혼식도 거행하지 않은 채 동거생활을 하여오다가 위 대흥사에서 친족만이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결혼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군 장성출신이나, 중앙정보부 차장, 국회의원 등을 지낸 전력이나 주변관계, 장영자의 배경 등을 과시하여 이를 십분 이용, 대기업의 어음을 교묘하게 입수,유통시켜 주식투기, 고리대금 등으로 일확천금하여 동 합작은행설립 등에 필요한 자금을 조성 할 수 있다는 망상 하에 1981년2월경부터 장영자를 설득하여 어음사기를 하기로 하고 이철희의 전직부하로 구성된 하수인들을 통하여 미리 입수한 정보를 근거로 대기업에 실현가능성 없는 유리한 조건으로 거금을 대여하여 추기로 약속하고 대여금 상당액의 어음과 대여액 이상의 견질(담보)어음을 교부 받아 이를 모두 사채시장 등에서 할인하여 약속한 대여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지급하고 나머지 할인금을 주식에 투자하거나 또는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기업에 대여하는 방식을 반복하여 취득한 어음을 다시 사채시장 등에서 할인, 활용하였음.
▲이들이 국내 대기업체로부터 거액의 어음을 교부 받아 유통시킬 수 있었던 배경
우리 나라 경제계는 1980년대의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상당히 어려운 길을 걸어오고 있었음. 이와 같은 불황에 따라 대부분의 국내 기업체에서는 긴박한 자금 사정으로 여러 가지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기업어음을 사채 시장에서 할 일하여 기업자금으로 활용 하지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형편이었음.
그러나 사채는 이율이 극히 높은데다가 통상 3개월마다 할인한 어음을 결재하여야 하기 때문에 기업체로서는 부담이 크지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며 이철희와 장영자는 기업체의 이와 같은 어려움과 약점을 역이용하여 이와 같이 엄청난 사기행각이 가능했던 것임.
▲이 사건에 대하여 세간에서는 탐욕적 성품의 장영자라는 여인이 형부 이규광의 비호 하에 사기를 한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으나 검찰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장 여인의 사기사건이 아니라 일찌기 소년시절부터 절도사기의 전과가 있는 음흉한 이중인격의 이철희가 중앙정보부 차장, 유정회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가 그 직을 그만둔 후 일정한 직업 없이 소일하던 중 1975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재직 시 중동을방문 하였을 때 중동 오일달러 국내유치 가능성을 타진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은 적이 있고, 구 정권시대 정부의 특혜를 받아 해외합작 회사를 만들 경우 재벌 급 기업으로 급성장한 사례가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해외합작회사를 만들어 재벌급 기업주로 성장 할 수 있다는 망상 하에 한·중동합작 은행설립 등 해외합작 사업을 추진하기로 계획하고 우선 필요한 자금을 조성하여야 하고, 배후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특권층과 밀착하여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의식구조를 탈피하지 못하고 그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던 것임.
▲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이규광의 처제 장영자가 독신이며 사교적이고 꽤 많은 자금을 보유하면서 사채업계에서 상당한 활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한 후, 동인과 밀착하면 배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층과 자금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 적극적으로 장영자에게 접근하기로 기도하고 당시 이철희는 주거지에서 일본여인「노시마·도미꼬」와 동거중이며 그녀와 사이에 4살 된 아들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영자의 수양어머니인 장대보화 보살이 자주 다니는 서울 관악구 상도동소재 백운암에 자주 다니면서, 1979년 12월경 장대보화 보살을 통하여 장영자를 소개받은 후, 교묘한 방법으로 장영자를 유혹하여, 1980년 6월경부터 동거에 들어감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던 것.
그후 이철희는 10여 년간 가장 가까운 측근 브레인 비서로서,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니던 중앙정보부 차장보좌관·유정회 의원 비서관을 지낸 임문순을 대화산업 비서실 부장으로, 중정 제1국장을 역임한 권영백을 대화산업 연구개발실장, 중정 심의관을 지낸 김재진을 경주 유스호스텔 대표이사, 중앙정보부 정보국장 보좌관실 자료담당관을 지낸 박재욱을 대화산업개발부장 등으로 각각 임명하여 동인들로 하여금 한·중동 합작은행 설립, 앨라배마주 지하자원 개발계획, 클라크 회사와의 합작계획 등을 수립케 했음.
또 이 계획을 장영자에게 그럴듯하게 설명하면서 위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면 일거에 국내 재벌급 기업으로 부상 할 수 있을 것처럼 장영자를 현혹시킨 후 배후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이규광에게 적극적으로 접근, 환심을 얻음과 동시에 이를 경제계·정치계·금융계 등의 유력 인사에게 과시하기 위하여 수시로 파티, 불사 등을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81년 1월 친척들의 참석하에 해남 대흥사에서 1차 결혼식을 거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82년 2월경 사파리 클럽에서 2차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국내 재벌 급 회사대표·은행장·국회의원·전직장성 등 1백20여명을 초청 한 후, 이규광으로 하여금 친족대표로 인사하게 하여 배후영향력이 있는 양 과시하고, 해외 합작회사 설립 등에 필요한 자금조성을 위하여 여러 정보망을 통하여 파악한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체에 접근, 장영자를 하수인으로 하여 공영토건 등 관련기업에 자금대여 등을 빙자로 거액의 어음을 사기하여 이를 자금화 한 후, 해외합작사업을 추진하는 일방, 여의치 못할 경우 재산을 해외로 도피하고자 한 것이 밝혀짐으로써, 이 사건은 이철희가 주동한 조직적·계획적 사기사건이라고 평가됨.
▲이철희는 일확천금의 망상 아래 자신의 전력과 주변관계 및 장영자의 신분을 교묘히 이용함으로써 이와 같은 범행이 가능하였던 것. 이리하여 이철희는 대상 회사의 물색·접촉방법·회사간부의 성향 등을 파악 한 후 공영토건 등 주요 관련회사와의 최초 거래 시 접촉에 앞장섰고 전 중앙정보부 직원들을 대화산업사원·개인비서·경비원으로 고용함으로써 자기의 전역을 은연중 과시함과 아울러 권력기관과 상당한 연관관계를 갖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으며 수 억원을 거래하면서 영수증도 안 받고 차용해 주는 식으로허세를 보였을 뿐 아니라, 이철희의 일기장을 보면 부도를 막을 수가 없어 자살하고 싶다는 부분이 기재되어 있는 것 등으로 보아 이철희가 주동적으로 이런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됨.
◇취득한 돈의 행방
▲6천4백4억원의 어음 중 2천5백86억원을 전영채에게 할인하고, 할인이자 3백37억원을 공제한 2천2백49억원을 마련하였고 7백34억원은 한양증권 감사이며 이철희·장영자의 어음할인·주식매수 등의 일을 맡아온 김종무에게 할인이자 88억원을 공제하고 할인하여 6백46억원의 현금을 조달 받았으며, 또 2백33억원은 곽경배에게 주식선매의 형식으로 할인하였는 바, 할인이자 63억원을 선 지급하고 할인하여 1백70억원의 현금을 조달 받았으며, 1천5백15억원은 조흥은행 등으로부터 지급보증을 받아 이를 서울투자 등 6개 단자회사에서 할인하였는데, 할인이자로 19억원을 지급하고 1천4백96억원의 현금을 마련하였으며, 1천 3백36억원은 수배 중인 황혁로를 통하여 할인이자 2백26억원을 지급하고, 1천1백10억원 조달함으로써 6천4백4억원에 대한 할인이자 7백33억원을 공제 당하고 모두 5천6백71억원 상당의 현금을 수중에 넣었음.
7백33억원의 할인이자는 발행일로부터 3·21개월 후에 지급기일이 도래하는 액면6천4백4억원의 어음을 월 평균 3·57%로 할인하여 5천6백71억원의 현금을 조달하였다고 설명할 수있을 것임.
이를 다시 한번 정리한다면 이철희 등이 동기간 중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원래 자기들의 자금 20억원 상당과 기업대여금에 대한 이자수입 84억원 상당과 어음할인에서 할인이자를 공제하고 조달된 5천6백71억원을 합한 5천7백75억원이 되는 것임.
이 5천7백75억원은 어음할인 등 방법으로 유통시켜서 지급기일이 도래하는 어음에 대한 결제자금과, 관련 회사들에 대한 대여금과 주식투자로 인한 손실충당, 금융기관 등에 대한 예금 유치비용(소위 양건예금에 대한 유치비용),자기들의 개인재산 취득 및 개인소비 등 6개부문의 항목에 소비되었음.
어음 결제자금으로 사용된 내역은 이들이 할인으로 유통시켜 지급기일이 도래 된 공영토건 어음 2천83억원과 일신제강 어음 1천3백97억원, 라이프주택 어음 8백27억원, 경남기업 어음 l백80억원을 합한 4천4백87억원을 위 할인 등에서 조달된 돈으로 결제하였음.
관련회사들에 대한 대여금으로 사용 돤 내역은 공영토건에 1백69억원, 일신제강에 1백57억원, 라이프주택에 2백억원, 삼익주택에 50억원 등 도합 5백76억원임.
▲이철희·장영자의 주식투자손실부분
장영자는 1976년경부터 증권회사를 통한 주식거래를 시작하여 1979년 상반기까지는 매입한 주식의 주가앙등으로 12여억원의 이익을 얻게 되었는데 1980년에는 일단 주식투자를 중단하였다가 1981년 2월경부터는 그간의 어음할인으로 조달한 유동자금이 생기자 대규모로 주식을 매입하여 주가를 올린 뒤 이를 매도하는 방법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고 그때부터 대한석유공사 주식을 비롯한 대림산업 등 수 개 건설회사와 은행주식 등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하였음.
그리하여 다량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고 주가도 상승하여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이철희·장영자가 그간 거액의 어음할인을 해 온 결과 막대한 금액의 어음결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고 자금 융통의 길이 막히자 보유한 주식선매를 시작하게 되었음.
주식 선매란 증권 거래법 상 인정되는 주식 거래 방법은 아니나 주식거래의 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론적으로는 주식매매 당사자가 약정 당시 당사자의 사정에 따라 주당 매매가 액과 매매주식 수를 미리 결정하여 대금을 선불 받은 후 약정한 주식 수만 인도하면 되는 것으로 인도 시에 이르러 주가가 앙등하면 매수인의 이익으로, 하락하면 매도인의 이익으로 돌려지는 것임.
그러나 이철희·장영자의 경우는 급박한 자금조달의 필요성 때문에 이론적 선매행위를 하려다가는 매수인으로서는 주가 하락시의 손실이 우려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매수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주가의 등락에 관계없이 매수인에게 항상 유리한 조건으로 팔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어서 때로는 이철희·장영자에게 손해가 덜한 방법으로 약정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우선 자금을 융통받는 대신 매도인의 요구에 따라 매도될 주식 수 만큼의 매도인 주식을 이철희·장영자가 보관하는 양 이철희·장영자 명의의 주식보관증과 함께 어음을 담보로 교부함은 물론 약정한 주식인도 당시의 주가보다 2백원 내지 4백원 심지어는 주가의 반액상당으로 계산하여 융통한 돈에 상당한 주식을 넘겨주는 선매의 방법을 택함으로써 정상적으로는 설명키 어려운 손실이 생겼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음.
따라서 이는 순수한 주식 선매라기보다 긴급한 자금조달 방법의 한 형태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님. 이것은 주로 초기 선매과정에서 이철희·장영자가 매도할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경우의 선매방법에 관한 설명인데 그와 같은 경우에 이철희·장영자로서는 약정당시보다 인도당시에 주가가 앙등하면 선매차액 즉 2백원 내지 4백원 정도의 손해를 보는데 그치지만 주가가 하락하면 하락한 만큼의 손해에다 선매차액의 손해를 더 입게 되어 이중 피해를 보게되는 것임.
한편 이철희·장영자가 주식을 전부 보유치 못한 상태에서 선매행위를 한 경우도 많았는데 그리한 경우에는 약정한 인도 기일까지 주식을 매입하여 인도하여야 아였으므로 증권회사를 통하여 주식을 매입하려고 하면 선매 매수인인 전영채 등을 통하여 그러한 풍문이 전파됨으로써 일시 반짝하는 주가반등세를 나타낼 때도 있어 그러한 경우 이철희·장영자는 오른 시세로 주식을 매입하여야 하는 부담도 있었음.
▲주식매수 당사자들의 일치된 진술 및 증권관계 전문가의 자문과 추척된 주식거래 내역표 등에 의하여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김종무롤 시켜 81년2월부터 82년3월경까지 사이에 삼보증권 등 증권회사로부터 대림산업 등 7종의 주식4만주를 6백억원에 매입하였고, 한홍수를 시켜 대보증권 등 증권회사로부터 81년5월경부터 81년8월경까지 사이에 대한석유공사 주식 등 2천5백43만 주를 2백98억원에 매입하였으며 홍종면을 시켜 81년9월경부터 81년11월경까지 사이에 대보증권 등 증권회사로부터 라이프 주식 등 80만주를 8억원에 매입하였고 정관용을 시켜 81년4월경 대한증권 등 증권회사로부터 대한석유공사 주식 등 20만주를 2억원에 매수함으로써 도합6천6백43만주를 9백8억원에 매수하였음.
▲주식매도
이철희·장영자 부부는 전영채로부터 81년4월경부터 82년4월경까지 사이에 수회에 걸쳐 선매대금 3백 30억원을 받고 매입가격 6백억원 상당이 소요된 대림산업 등 7종의 주식 도합4천만주를 인도함으로써 2백70억원의 손실을 보았고, 곽경배로부터 81년8월경부터 82년4월경까지 사이에 수회에 걸쳐 선매대금 1백44억원을 받고 매입가격 2백36억원 상당이 소요된 대한석유공사 주식 등 4종의 주식 도합 2천 63만주를 인도함으로써 92억원의 손실을 보았으며, 임태수로부터 81년 10월경부터 82년 1월경까지 사이에 수회에 걸쳐 24억원의 선매 대금을 받고 매입가격 37억원 상당이 소요된 동아건설 주식 등 2백 70만주를 인도함으로써 13억원의 손실을 보았고 수배중인 김지명으로부터 81년 11월경부터 82년 1월까지 사이에 16억원의 선매대금을 받고 매입가격 25억원 상당이 소요된된 대한석유공사 주식 등 2백20만주를 인도함으로써 9억원의 손실을 보았으며, 임창근으로부티 81년11월경부터 82년3월경까지 사이에 수회에 걸쳐 선매대금 7억원을 받고 매입가격 10원 상당이 소요 된 한양주택 주식 등 90만주를 인도함으로써 3억원의 손실을 본 사실이 밝혀져 총 합계를 산출하여 본 결과 선매대금으 로 총 5백21억원을 받은 대가로 매입 가격 총액 9백8억원이 소요된 주식 6천6백43만주를 인도함으로써 총3백87억원의 손실을 입었음.
▲예금 유치용으로 소비 된 81억원
이철희 등이 어음을 교부 받아 온 관련회사들로부터 더 많은 어음을 사기 또는 대여 받아 이를 취득하기 위하여는 그 미끼로 자금난에 허덕이는 위 관련회사들 앞으로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게 할 필요가 절실하였고 이를 위하여는 그 금융기관에 대하여는 이 대출에 소요되는 액수이상의 예금 등을 마련하여 대출자금을 조성하여 주는 것이 견제가 되어야 하므로 이들 금융기관에 이 자금조성을 위한 예금이나 자원이 될 돈을 유치시키고 사채이자와 금융기관 이자와의 차액을 전보하는 명목으로 금융기관에 이 자금을 조성하여 준 사채업자들에게 비용을 지급하였던 것임.
김종무·장동호를 시켜 조흥은행 반도지점을 비롯한 4개 은행 점포와 동양투자 등 7개 단자회사 등에 수 천 개의 가명구좌로 1천7백21억9천만원을 조성케 하고 위 비용 77억2천3백만원을 지급하고, 또 한홍수를 시켜 중앙투자 등에 위와 같은 방법으로 도합 80억원을 조성케 하고 그와 같은 명목으로 비용 4억원을 지급하였음.
▲이·장의 재산취득
이들은 이철희·장영자 및 장영자의 오빠인 장상율, 그들이 설립한 대화산업 및 그들이 인수한 성읍목장 명의로 대지. 건물·임야·답·사찰 등의 부동산을 매입하였음.
그들의 별장인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소재 8만평 상당의 대지 및 임야와 그 건물, 서울강남구 청담동 소재 건평9백95평의 대화빌딩 및 그 대지, 같은 구 논현동 소재 4백2평의 대지, 부산 해운대구 중동에 있는 3천 여 평의 임야와 대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사찰인 각진선원 및 1만 여 평의 그 부근 대지, 경주시 구정동 소재 유스호스텔의 대지 및 건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소재의 답 4백42평,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에 있는 2백98만2천2백66평의 성읍목장, 토지개발공사로부터 사들인 부산시 범일동 830의 140에 있는 2천4백94평의 대지, 경기도 화성군에 있는 9천1백86평의 임야 등 12건의 부동산 취득에만도 98억9천여만원을 사용했음.
한편 외화·금·보석·골동품·서화나 유가증권 등 동산 등을 매입하거나 예금, 현금 등을 보유하고 외화를 해외도피 은닉하는데 소비한 금액만도 96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이들이 자기들의 재산취득을 위해 사용한 금액은 모두1백95억원 상당임.
▲무모한 사업확장 비용
친지 등에게 사용한 것으로는 이규광에게 청탁자금 명목으로 도합 2억원을 제공하였고, 장영자의 친정 아버지 장병준에게 생활비 및 주택구입 자금 등 명목으로 3억2천8백만원을 주었고 오빠 장상율·장진혁, 동생 장현민 등 경제들이나 전 남편 김수철 등의, 생활비, 사업자금, 결혼보조금 등의·명목으로 자금을 소비하는 등 도합 10억7천8백만원을 사용하였음.
이들의 사업체인 대화산업 등 운영비와 하수인 및 사용인에게도 과다한 돈을 소비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화산업·대화정보산업·성읍목장 등 운영비로 7억4천여 만원을 사용하였고 유스호스텔 증축 비용으로 5억원을 지츨하였으며, 하수인인 전영채. 김종무 등에 대한 수고비 명목으로 모두 6천만원을, 사용인 남문성·육석재·권영백 등에게 같은 명목으로 8천만원, 비서 김용남과 경비윈 고한상·채종율·이종성·송준규, 운전기사 신동준·김광수 등에게 주택구입 자금으로 1억5천5백만원을 사용하는 등 15억4천 여만원을 소비하였음.
자기들의 신앙심을 빙자하여 불교계 등에서 터무니없는 위세를 부릴 목적으로 사찰운영 보조금, 기타 행사원 조금 등 행사관계 비용 명목이나 이로 인하여 알게 된 스님들의 생활비나 지원자금 등 명목으로 모두 7억6천7백만원을 소비하였음.
이철희·장영자 등이 일시적으로 타인에게 금액을 대여하고 아직까지 회수하지 못한 것도 상당액에 이르는 바, 부산의 콘테이너 회사 근무 백운학에게 대여한 2억1천2백만원, 정토사 신도회장에게 대여한 3억원, 모 대학 김 모 교수 등 수인에 대한 대여금 3억원 등 도합 8억2천만원이 지급되어 회수되지 아니한 상태에 있음.
비서·통역인 등 수행원 4∼5명을 대동하고 6회에 걸친 호화판 해외여행과 캘리포니아 합창단 30여명 또는 회국 불교인사를 초청하는 등 외국인 초청으로 인한 접대비 등과 결혼에 관련된 제반비용 및 가구구입비 등으로 2억8천4백92만원을 소비하였으며 의상비·잡비·기타 호화생활비로 4억2백90만원을 소비하여 도합 6억8천여만원을 사용하였음. 따라서 이들의 개인소비는 도합49억원 상당에 달하고 있음.
▲이로써 이들에게 사용이 가능하였던 돈 5천7백75억원은 어음결제자금에 4천4백87억원,관련회사 대여금으로 5백76억원, 주식투자 손실로 3백87억원, 예금 유치 등 비용으로 81억원, 이들의 재산취득 자금으로 1백95억원, 개인 소비로 49억원 상당이 사용됨으르써 그 행방이 뚜렷해 졌음. 따라서 이 자금 중 일부가 정치자금 등에 제공되었다는 항간의 낭설은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임이 증명된 것임.
◇.은행관계자 비위
▲전 조흥은행장 임재수가 이규광을 처음 만난 것은 l981년11월 하순경 정신문화 연구원에서 4박5일 일정의 교육을 받던 중 같은 반에 편성되어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이고 양인이 두 번째 접촉한 것은 l982년l월 초순경 당시 한국감정원 이사로 있던 임재수의 고향 후배 박종일이 부원장 김광정과 같이 은행장실을 찾아와 금융단과 한국감정원간에 체결한 부동산감정 문제로 의견을 나눈 뒤 우연히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 이야기가 나와서 은행장이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인사를 나눈바, 있다면서 이규광을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박 이사와 김 부원장도 이를 승낙하면서 옛날 군에 있을 때 상사로 모셨던 사람이니 같이 점심이나 하자고 약속하고, 며칠 후 호텔 신라 일식 집에서 4사람이 만나서 점심식사를 하게되었고 그때 나눈 대화 내용은 은행금리 문제, 감정원의 업무문제, 골프얘기 등 일반적이고 의례적인 것이었음.
세번째 접촉 한 것은 1982년 2월14일 경 장영자·이철희 부부의 결혼식장에서 인사만 나누었고, 네 번째 만난 것은 결혼식이 끝난 며칠 후 워커힐 별장에서 개최된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되어서 인데 당시 참석자들이 많아 인사만 하였을 뿐 특별히 대화를 나눈 것은 없음.
이상 4회의 접촉이 양인이 대면한 전부이고 이는 장영자·임재수·이규광·박종일·김광정의 진술에 의해 확인 된 것임.
이처럼 양인의 접촉 경위가 모두 우연한 연유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대화내용도 의례적인 것이므로 임재수·이규광이 적극적으로 상호 접촉을 도모코자 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지나, 임재수가 장영자에게 대출의 편의를 봐줌으로 인하여 장영자를 통하여 자기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이규광의 후광을 기대하였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고 하겠음.
그러나 이와 같은 접촉을 통하여 임재수가 이규광으로부터 부정대출의 청탁이나 압력을 받은 사실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음.
▲조흥은행장 임재수의 지시에 의한 어음장 과다교부의 내용은 l982년2월18일 조흥은행 덕수 지점에서 공영토건에 대하여 당일기준 적정 교부량이 3백5l매 임에도 불구하고 8백 매를 교부하여 4백49매를 초과 교부하였다는 것임.
당시 덕수 지점장 김중수의 진술에 의하면 당일 공영토건 변태수 상무로부터 어음장 과다교부의 요구를 받고 4∼5시간에 걸쳐 서로 옥신각신 하던 중 은행장 임재수로부터 전화가 와서 공영토건에 대하여 어음장을 교부하지 않음으로써 거래가 중단되는 사태는 막아야한다는 내용의 지시가 있어 지점장의 책임 하에 위와 같이 초과 교부 한 것이라고 하며 장영자의 진술에 의하여서도 당일 장영자가 은행장 임재수에게 공영토건에 대하여 어음장을 많이 교부 해 주도록 덕수 지점장에게 지시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밝혀졌음.
은행장 임재수는 덕수 지점장에게. 어음장 과다교부의 지시를 한 기억이 없다고 하나, 위와 같이 덕수 지점장 김중수와 장영자의 진술에 의하여 지시한 사실이 명백히 입증 된 것임.
◇이규광의 관련 사실
▲이철희가 1975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재직하면서 중동을 방문하였을 때 중동 오일 달러의 국내 유치에 대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얻은 데 착안하여 한·중동 합작은행 설립을 꿈꾸어 오던 중 자신의 주도하에 동 은행의 설립을 추진하려고, 198l년8월경부터 대화산업 연구개발실장 권영백으로 하여금 한·중동 합작은행 설립방안을 연구하게 하고 같은 해 10월 하순경 권영백을 대동 도불하여, 동 은행설립을 위하여 중동에 대한 중개선 물색을 모색하고 귀국한 후 동 은행설립 인가를 받기 위하여 1982년3월 초순경 이규광을 방문, 동 은행설립인가를 받도록 알선하여 달라는 청탁을 하고 동 월 중순경 재차 전화로 독촉한 후 동 월 하순경 장영자와 함께 이규광에게 동 알선청탁의 명목으로 자기앞수표 1억원을 제공하였고, 이규광은 동 은행설립 인가를 받도록 관계부처에 알선해 주겠다고 승낙한 사실을 밝혀내고 공무원의 직무에 속한 사항의 알선에 관하여 금품을 수수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규정인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구속하였음.
그러나 이규광은 한·중동 합작은행 설립인가와 관련하여 관계부처에 지금까지 청탁한 사실은 없었음.
▲1982년 2월초순경 장영자가 이규광에게 강남구 청담동 소재 가옥 l동 싯가 3억2천만원상당을 증여할 의사로 동 가옥의 등기권리증을 교부한 사실과 1982년 2월 하순경 장영자가 이규광의 장남 생활보조금 및 차남 결혼비용 등으로 자기앞수표 l억원을 이규광에게 교부한 사실이 밝혀졌으나 동 가옥은 장영자가 소유주 전영채와 구두로 매매하기로 약정하였을 뿐,매매 대금이 일체 수수되지 않았고, 이규광은 현재까지 그 집에 대한 소유권이전 등기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집을 인도 받아 거주한 사실도 없어 증여세 포탈 등의 범죄는 구성되지 않고, 1억원을 증여 받은 행위가 증여세 포탈의 범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증여세 신고기간인 6개월이 경과하여야 하는데, 신고기간(1982년 8월 하순)이 경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죄가 불 성립하는 것으로 판명되었음.
이 점은 국세청에 통보하여 증여세를 징수하도록 조치하였음.
▲이규광이 이철희·장영자 부부와 사기공범 또는 관련 은행장 등과의 의무상 배임의 공범이 되는가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하여 보았으나, 이규광이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어음사취 행위와 조흥은행장·상업은행장의 부정대출 행위에 법률상으로 보아 공범으로 인정 될 만한 적극적인 행위를 전담하여 가담한 사실이 전혀 발견되지 아니하였음.
▲그러나 이규광은 평소 자기신분을 과시하면서 은연중 세도가 행세를 함으로써 각종 비리에 관여된 사실이 있는가에 대하여 계속 수사 중에 있으며 범법행위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엄단할 방침 임.
◇배후관계
▲이철희 등이 취득한 돈의 행방과 관련하여 항간에는 정당 또는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으로 그 일부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나돌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돈의 행방을 철저히 추적 수사했음.
이철희·장영자는 권정달 의원을 전연 만난 사실이 없다고 하고 전 조흥은행장 임재수, 전 상업은행장 공덕종도 권 의원을 만나거나 청탁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관련기업인 공영토건이나 일신제강의 책임자인 변강우나 주창균 등을 조사하여 보아도 전혀 권정달 의원이 이 사건에 관련된 사실이 나타나지 아니하며 공영·일신 등 각 거래회사의 어음장 부본, 은행 결제상황을 일자·어음번호·금액별로 확인한 바 순차적으로 결제되어 나가는 과정이 연속되어 있어 특별한 거액의 자금이 인출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고 82년도 이르러 할인이자의 누계 액이 크게 늘어나고 주식투자 손실액이 늘어남에 따라 부족액이 거액에 달하게 된 것임.
▲정치자금 관련여부에 대한 낭설이 떠돌아다닌 것은 권 의원이 공영토건의 감사로 있는 변강우 사장의 매제인 김동희와 동향인으로서 초·중·고등학교 동기동창 관계에 있고 이철희·장영자 부부가 자기들의 자금능력 노출을 은폐하기 위하여 어음할인을 담당하는 사용인, 주식매수 사용인, 주식매도 사용인 등을 점 조직 식으로 상호 극비리에 사용하여 왔는데 주식매수 사용인 김종무는 장영자가 주식을 매수하기만 하고 선매 등의 방법으로 매도하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무슨 거대한 자금이 이철희·장영자 부부에게 있는 것으로 오인하여 발견함으로써 이것이 증권시장 등에 와전되어 유언비어 화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됨.
▲검찰이 권정달 의원을 직접 소환, 조사치 아니한 이유는,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이철희·장영자와 전 조흥은행장, 공영토건 임원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권 의원이 은행관계인 등에게 압력·청탁·기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부정한 행위를 한 사실이 일체 없었음이 밝혀졌고, 일반적으로 투서나 세론을 수사의 단서로하여 고급 공무원이나 사회적 저명인사를 소환 조사할 경우 투서 등에 나타난 허무맹랑한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 처럼 왜곡되어 전파됨으로써 소환된 당사자의 명예를 손상시켜 본의 아닌 불이익을 주는 사례가 많으므로 이점 또한 고려치 않을 수 없었던 것임.
▲1982년 2월14일 이철희와 장영자가 사파리 클럽에서 결혼식을 거행할 때 다수의 정계 및 재계인사가 참석한 사실을 두고 이들이 이철희·장영자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 항간의 의혹이 있어 이 점에 대해 조사한 결과, 당시 결혼식에 전직 및현직 국회의원·예비역 장성·은행장·회사대표 등이 참석한 것은 사실이나 이들은 이철희와의 군대 동기 선 후배와 이철희가 국회의원 재직 중 친교를 맺었던 사람이거나 이철희·장영자 등과 거래를 하였던 은행장·회사대표들로서 의례적으로 참석했을 뿐이고 결혼식에서 가족대표 인사를 한 이규광도 두 사람에 대한 축복과 지도편달, 왕림에 대해 거듭 감사한다는 내용의 의례적 인사를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고, 동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 사건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은 전혀 발견 할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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