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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때도 총소리 한 번 못 들어본 마을|취재기자들이 말하는 참사의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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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광란과 죽음이 뒤범벅 된 의령군 궁류면 참사현장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빚어진 충격적인 뒷얘기들이 많다. 경찰이 우순경의 범행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하는 사이 위험을 무릅쓰고 부락민들을 구하려다 비명에 간 택시운전사, 전깃불을 꺼 일가족 몰살을 면한 어느 가장의 기지 등 현장취재방담을 엮는다.
마치 전화가 휩쓴 듯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주민들 표정에서 이번사건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역력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른·아이 할것 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어처구니없이 넋을 빼앗긴 것처럼 맥놓고 주저앉는 모습, 그것은 한마디로 포화가 휩쓸고 간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길가와 논두렁·집앞 곳곳에 아무렇게나 나딩굴고 있는 시체들, 빗물과 뒤범벅된 채 흥건히 괴어있는 피의 웅덩이, 폭발 때 날아가버린 농가의 창문 등등…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사건이 너무나 엄청난 탓이었는지 주민들은 물론 관계당국에서조차 앞으로 무엇부터 손을 써야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하늘이 무너졌다한들 이처럼 가혹할 수가 있겠느냐고 한탄하며 모두들 삶의 의욕을 잃은 모습이었지요.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에 일그러져 있는 공포의 그림자는 하늘 아래 가장 인심좋은 마을이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했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하루일을 마치고 가족이나 이웃들과 함께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있던 이 산간마을에 뛰어들어 마구 총기를 휘두른 범인 우는 마치 양떼를 지키던 충견(충견)이 갑자기 늑대로 돌변한 모습보다 더 했습니다.
양순한 주민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설마 자신들을 돌보던 경찰관이 그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으니까요.
칠흑같은 밤에 갑자기 총소리가 울리자 주민들은 한결같이 무장공비나 간첩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다더군요. 우순경이 초상집에 들러 『비상이 걸려 간첩을 소탕하러 나왔다』는 우순경의 말을 의심하기는커녕 『제발 우리옆에서 지켜달라』고 애원까지 하다가 우순경이 쏘아댄 총탄에 숨졌습니다.
-농촌지역의 특성 때문에 인명피해가 더욱 컸습니다.
도시처럼 상가의 불빛이나 가로등이라도 있었다면 마을사람들이 우순경의 난동을 좀더 빨리 알아차려 대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문밖에 나서면 어둠에 휩싸여 어디에서 총성이 울리고 누가 쏜지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친처럼 날뛰는 범인 우가 불켜진 집만을 골라 불나비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닥치는대로 총질을 했으니 다른 집에서는 직접 피해를 당하기 전까지는 우순경의 난동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지요.
-범인 우가 자신이 근무하던 지서관할지역 주민들을 이처럼 대량사살한데는 평소 마을사람들에게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가 전말순양과 내연의 관계를 맺게된 사연을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으며 또 경찰관의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같은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눈으로 보아왔던 탓이지요.
재빨리 불꺼 살아나
-우가 전양을 알게된 것은 부임 1개월만인 지난 2월초 전양이 집에서 잃어버린 닭을 찾아달라고 지서에 신고하러가서 우순경을 만나고 난 뒤부터였다지요.
전양은 관동여중을 졸업, 대구에 있는 모회사에 다닌 적도 있으나 80년9월 결혼을 서두르라는 집안어른의 독촉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우를 알게되고 한달만에 전양집에서 우순경과 동거를 시작했으나 전양 부모들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양가에서 이들의 결혼문제로 의논했으나 시기를 택하는데서부터 의견이 엇갈려 두 사람이 자주 말다툼을 해왔고 사건당일에도 싸움을 벌여 전양이 『결혼문제도 처리하지 못하는 당신은 남자자격이 없다』는 등의 면박을 했답니다.
-두사람이 동거해온 단간방에는 장롱·탁상시계·라디오 등이 있을뿐 세간이 적었고 외국잡지에 나오는 여자의 누드사진과 시구 등이 적힌 앨범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동거생활을 마치 소꿉장난처럼 즐겨온 것 같았어요.
-우순경이 여러 마을을 무법천지로 휩쓸고 다니는 동안 도대체 경찰은 무엇을 했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만 현장을 둘러보니 비상사태에 대한 경찰의 대비책이나 평소 근무자세엔 정말 문제가 많더군요.
-사건당일 지서장 허창순경사가 하오 4시50분쯤 지서차석 김진우경장과 함께 부곡온천으로 유람을 떠나 자리를 비웠고 하오 9시40분쯤 돌아와서야 사건이 터진 것을 알았는데 부랴부랴 예비군을 소집한다, 무기고를 점검한다고 법석을 떨었어요. 그러나 우순경은 이미 한마을을 쑥밭으로 만들고 사라진 뒤여서 어느 쪽으로 뒤쫓아 가야할지 정확히 몰랐어요.
소꿉장난같은 동거
-더구나 한밤중이라 조명탄도 없어 야간 추적은 거의 불가능했고, 주민들에게 대피할 것을 당부하는 것도 잊어 집안에 앉아 있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우순경이 총기를 들고 지서를 뛰쳐나갈 때 그의 동생과 방위병 3명이 지서입구에서 맞닥뜨려 만류했으나 끝내 저지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이들은 덕분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도대체 주민보호라는 관념은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로밖에 볼 수 없어요.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이웃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뛰어다니다 무참히 죽음을 당한 용감한 주민도 있었습니다.
사건당일밤 9시50분쯤 택시를 몰고 집으로 가던 전용길씨(37)는 지서앞에서 방위병이 『불을 끄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사태가 위급함을 판단, 차를 버리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려 불을 끄라고 소리치다가 열집 쯤 돌았을 때 뒤쫓아온 우순경이 총을 난사하는 바람에 온몸에 총상을 입고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락민들의 슬픔은 더욱 큰 것 같았습니다.
-주민들은 6·25사변이나 무장공비·간첩 등의 용어를 말로만 들었지 정작 쓰라린 경험을 겪어보지 못했는데 그보다 더 무서운 적이 가까운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조차하지 못하다가 끔찍한 변을 당한 셈이지요.
방위병들 속수무책
-문두출씨의 아들인 맏상주 문청군씨(33)는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겹친 2중 장애자여서 총소리를 듣지 못하고 우가 이집에 들이닥치기 직전 다음날 있을 발인준비 때문에 밖에 나가 화를 면했습니다.
궁류우체국장 장세현씨(55·운계리)일가족 4명은 미리 범인 우의 난동사실을 알고 방안에 켜둔 전깃불을 꺼 일가족 몰살직전의 위기에서 화를 모면했지요.
장씨는 『전깃불을 꺼라』는 옆집의 연락을 받은 것과 동시에 총소리가 울려 무장공비가 나타난 줄 알고 안방에서 부인 이영자씨(46), 장녀 혜숙양(25), 장남 혁수군(11·궁류국교5년) 등 4명과 함께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범인이 마당안으로 뛰어들어 3분가량 집안을 살피다 되돌아가 참변을 면했습니다.
-당직근무중 범인의 두 번 째 총탄을 맞고 쓰러진 궁류우체국 집배원 전종석씨(57)는 10년 근속의 모범공무원으로 전씨는 부인 백점악씨(58)마저 비명에 숨져 전씨의 3자녀 순난양(16), 장남 일도(12)·이규(9)군 등이 일시에 고아가 됐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가장 무참한 참변을 당한 것은 박인길씨(50·운계리74) 집의 경우로 박씨등 일가족 6명이 모두 숨졌습니다.
이웃주민 신외도씨(52)는 무인 손원점씨(51)와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하루아침에 홀아비가 되어 슬픔도 잊은 듯 허탈상태였읍니다.
-우순경과 같은 위험인물이 경찰에 계속 몸담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사건이 터진 후 이를 수습하는 현지 경찰의 우유부단한 자세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고쳐야할 과제라고 봅니다.
우순경이 4개마을 9백70여 가구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면서 난동을 피웠는데도 경찰은 속수무책이었지요.
심지어는 평소 매일처럼 이용하던 면사무소에 설치된 방송시설조차 주민대피방송에 이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무기관리도 엉망이었어요.
무기고열쇠는 각각 2개씩 마련, 1개는 지서에, 다른 1개는 지서장이 보관하도록 되어있어 당직경찰은 누구라도 손쉽게 사전 허락없이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어요.
무기고열쇠 막돌려
무기반입반출은 지서에서 필요할 경우 반드시 관할 경찰서장에 보고하도록 되어있고 안전관리를 위해 무기고가 허가 없이 열릴 경우에 대비, 비상벨 등 안전장치나 경보장치 등을 설치하도록 되어있는데 이런 시설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아 무기가 거의 방치된 상태였읍니다.
-벽지근무배치도 문제가 많더군요. 징계등 특별한 사유 없이 원하지 않은 곳으로 발령을 내는게 다반사여서 벽지근무경찰의 불만이 큰 것 같았습니다. 우순경의 경우 지난 80년12월20일 순경으로 임용돼 부산 남부경찰서 감만파출소와 서울 모경비단의 근무를 거쳐 지난해 12윌26일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의령으로 전출되어 불만에 차 있었다더군요.
-소위 시골경찰서나 지서의 주민들에 대한 고압적인 자세도 이번 기회에 고져야할 문제더군요. 우순경은 자신의 근무지역에서 비록 사생활이기는 하지만 마을처녀와 반강압적으로 동거해 와 주민들로부터 지탄을 받아왔고 술만 마시면 주민들에게 욕설과 행패를 부리는 등 품행이 좋지 않았으나 그 누구도 감히 시정을 본인이나 지서장 등 상대에게 건의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서장과 차석은 지방유지행세를 하며 놀아나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운 오리(오리)」로 주민들 사이에 소문나 있더군요.
-경찰은 이 와중에서도 현지에 내려온 국회조사반에게 보고하는 것과 내무부에 보고한 것의 내용을 달리하여 사실을 조작하는 악습을 보이기도 했읍니다.
경찰은 국회의원들에게 궁류지서 안승섭순경이 사건 당일 우순경에게 근무를 맡기고 집에 가고 없었는데도 반상회에 참석했다고 허위로 보고하는가 하면 지서장과 차석도 사건 당시 반상회 독려차 나갔다고 얼버무리기까지 했어요.
-26, 27일 현지에는 짖궂은 봄비마저 계속 내려 현지에 나온 사람들을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임시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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