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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길 닿은 전시장 미술품은 마음에 쏙쏙 꽂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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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호 22면

명함에 적힌 직함이 ‘디자인 매니저’다. 디자이너도 아니고 디자인 매니저는 뭘까. “큐레이터가 작가를 선정하고 작품 고르는 일을 한다면 저는 그 작품이 관람객의 마음에 와닿도록 전시 공간을 꾸미는 일을 합니다. 작가 선생님, 큐레이터들과 수십 차례가 넘는 회의를 통해 컨셉트를 잡아나가죠.”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 매니저 김용주

김용주(34)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 매니저의 목소리가 낭랑하다. 국내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간 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민속박물관과 미국 보스턴 피바디 에섹스 뮤지엄에서 전시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녀는 2010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 ‘생소한 일’을 시작했다.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화: 건축가 김종성’전. 도면을 서랍처럼 꺼내볼 수 있다.

독일 ‘왕중왕’ 디자인상 등 6개 연속 수상
지금까지 오후 10시 퇴근이 정례화됐을 정도로 일에 공을 들인 덕분에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서울관이 개관하면서 그의 일도 덩달아 확 늘어났다.

치열한 노력은 달콤한 보상으로 이어졌다. 2012년 2월 선보인 ‘한국의 단색화’ 전시가 세계 디자인계 3대 상으로 꼽히는 레드닷(Red dot)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한 것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올해의 작가상 2012’(2012년 8월) 전시 공간은 역시 3대 디자인 상으로 꼽히는 아이에프(iF) 디자인 어워드 2013에서,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2013년 2월)가 다시 레드닷 2013에서 각각 호명됐다. 전시 공간 디자인으로는 모두 국내 최초의 성과들이다.

그런데 최근 또다시 낭보가 들려왔다. 조각가 최만린 선생의 삶을 투영한 ‘최만린전’(2014년 4월)이 일본의 ‘Good Design Award Japan 2014’에서 국내 최초로 전시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본상을 받게 된 것.

게다가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가 ‘독일 디자인 어워드(German Design Council’s International Premier Prize 2015)’에서 수상자로 뽑히는 쾌거를 올렸다. 독일 연방 경제기술부가 후원하는 독일 디자인 어워드는 1953년 시작됐는데,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 수상 작품들이 경쟁하는 일종의 ‘왕중왕’전이다. 독일 디자인 협의회(The German Design Council)의 추천을 받은 작품만 수상 후보가 된다. ‘올해의 작가상 2012’가 지난해 독일 디자인 어워드를 받은 바 있다. 이로써 전시 디자인 분야에서 3년간 6개 부문 수상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 것이다.

“전시 공간 디자인이라는 게 전시가 끝나면 없어지잖아요. 들인 공이 아깝기도 하고 의미를 기록해둘 만 하다 싶어서 자료를 만든 뒤 무작정 보내봤지요. 심사위원들도 전시 공간 디자인으로 응모한 경우가 많지 않아 매우 흥미로워 하셨습니다. 저로서는 회화(한국의 단색화)·조각(최만린전)·설치(올해의 작가상)·건축(정기용전)의 네 가지 분야로 모두 상을 받게 되어 더욱 뜻깊습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 (2013). 벽면에 창을 내고 테이블엔 서랍을 여럿 달아 입체감을 냈다.

관객 눈높이에서 … 보고 싶은 마음 들도록
그의 공간 구성의 가장 큰 특징은 관람객의 몰입을 유도하는 데 있다. ‘최만린전’의 경우 작은 조각들은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도록 설치대를 제작해 그 위에 올려놓았다. 또 가운데 가림막에는 커다란 창을 내 관람객들이 공간을 보다 입체적으로 느끼도록 했다. “조각 전시의 경우 대부분 비슷한 높이의 좌대 위에 작품을 올려놓는 일관된 형식을 띄는 경우가 많죠. 저는 최만린 조각전에서 ‘틈’ ‘창’ ‘담’의 요소를 집어넣어 관람객들이 ‘전환’ ‘사이’ ‘경계’ ‘펼쳐짐’이라는 다채로운 공간적 상황 속에서 작품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정기용전의 경우 2011년 타계한 건축가 정기용이 남긴 2000여 장의 기록물을 선별해 전시장을 만들었다. “길이란 세대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통로”라는 고인의 지론을 화두로 삼았다. 정기용은 “어떤 길목에서 할아버지가 바라보던 풍경을 똑같이 아버지가 바라보았고, 나 또한 같은 풍경을 바라 볼 수 있는 ‘길’은 곧 역사이며 ‘풍경’이다”라고 말했다. 김 매니저는 “관람객이 건축가가 남긴 자료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그의 생각과 삶에 대한 열정, 소통에 대한 의지를 느껴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며 “관람자를 이성적 감상의 주체로만 간주해 이론 중심의 동선을 꾸미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설명했다. 레드닷 심사위원회는 “관객들에게 정기용이 위대한 건축가임을 보여주기보다 고인이 열심히 살았던 한 인간임을 느낄 수 있도록 공간을 디자인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최만린전’(2014). 공간 구분과 조각들의 배치가 흥미롭다.

작은 차이로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 매니저의 손길
김 매니저가 도대체 어떤 마술을 부려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전시를 관람하지 못한 사람들이 제대로 느끼기란 쉽지 않다. 사진이 주는 평면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마침 그가 새로 꾸민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시작됐다.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화: 건축가 김종성’(9월 23일~2015년 4월 26일)이다. 올해 79세인 김 건축가는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로 힐튼호텔, 서린동 SK사옥, 서울대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을 통해 그의 모더니즘 건축관을 이 땅에 구현해 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남산에서 서울 시내 북쪽을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는 반투명 사진이 코르텐(부식 철) 틀 속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김 매니저는 “쇠와 유리가 중심이 되는 고층 빌딩을 많이 지은 건축가의 작품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했다”며 “뒤로 자연 채광이 되어 날씨에 따라 다른 화면이 펼쳐진다”고 설명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 그의 일리노이 공대 건축학과 시절의 일상을 재현한 공간에서 그의 족적을 느끼고 다시 왼쪽으로 오면 지금까지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지금은 컴퓨터로 작업하지만 옛날에는 다 손으로 그렸잖아요. 선 하나에도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보여주기 위해 디스플레이 책상도 제도판 느낌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벽에 붙인 스탠드도 건축 사무소 느낌을 담았죠. 이 퐁피두 센터 설계 지원작은 김 선생님이 직접 손으로 그린 것이에요.”

그가 설계한 고층 빌딩의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컬럼을 수직으로 만들고 벽면에서 도면을 서랍처럼 꺼내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벽면에는 도면 트레이싱 지를 나란히 걸어놓았는데 나풀거리지 않고 얌전히 매달려 있다. “관람객 눈길을 끌기 위해 벽체를 기울여 만들었어요. 도면 끝에는 자석을 붙여 놓아 자력으로 물결치도록 만들었죠.”

결국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작은 차이는 정성과 열정에서 시작된다. 이 전시 공간 역시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주요 대회에서 연속 수상했으니 상금도 많이 받았겠다”고 슬쩍 눙쳤다. 그랬더니 미소와 함께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상금은 없고요, 오히려 수상 로고를 사용하려면 사용료를 내야 한대요.”

과천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김춘식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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