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자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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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런일 저런 일로해서 「찬후탄」신부및 「호앙퀸」신부와 「티우」대통령과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홋날 월남공시혁명정부(배트콩)의 법무장관「충뉴탄」은 전기「홤녹타오」대령을 소련의 세기적인 명스파이「조르게」에 맞먹는 공산거물스파이였다는 사실을 증언하여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틱치쾅」승은 반공지도자이긴 했으나, 그는 자유윌남에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든지간에 항상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
이 생리적인 만년야전지도자와 「호앙퀸」신부·「찬후탄」신부가 제휴해 「티유」정권타도의 정치기동에 박차를 가한것은 71년중반부터였다.
이들은 주로 학생들을 동원하여 데모를 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71년9월12일 안쾅계 사이공대학생 데모대는 믈로토프칵테일 수류탄으로 사이공시내에 있는 미국대사관 추차장을 공격하여 차량 3대를 소각하고, 『「티우」를 타도하자』 『「벙커」대사는 즉시 물러가라』 『미국은「티우」지지를 중단하라』는 등의 비라를 살포하고 구호를 외쳤다.
9월14일에는 신부 8명을 선두로 하여 가톨릭학생들과 교수들로 편성된 데모대가 앞에 기술한 유사한구호를 외치며 사이공 번화가를 행진했다.
9월21일에는 사이공대 문리대의 가톨릭 학생들및 불교계 학생들이 학기말시험을 보이코트하고『군사훈련반대』『「티우」는 물러가라』 『10·3선거반대』등의 구호를 의치며 가두데모를 했다. 그들은 교문앞에서 군사훈련복과 투표통지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경찰에 용로토프칵테일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러한 반정부·반미시위는 다반사로 자유월남에서 부단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인 「티우」대통령은 신부나 승려 같은 성직자는 한명도 체호하여 투옥시킨 일이 없었다. 이것이 「고·딘·디엠」태통령과 다른 점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75년3월10일 북월맹 정규군 18개사단 총병력은 17도선을 넘어 자유월남을 향해 홍수 같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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