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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리스트맨’ 그리고 로빈 윌리엄스를 향한 뒤늦은 고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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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11일, 세상은 로빈 윌리엄스(1951~2014)를 잃었다.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출연작이 작은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그 중 국내 관객이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은 ‘앵그리스트맨’(원제 The Angriest Man in Brooklyn, 10월 30일 개봉, 필 알덴 로빈슨 감독). 이 영화와 함께 그에 대한 뒤늦은 애정 고백을 전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 남자는 곧 폭발할 것만 같다. 꽉 막힌 도로에서 남자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다. 표정만 봐도 성품과 행동이 짐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도착한 병원에서 눈꼴 사나운 행태를 보인다. 뇌동맥류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진단을 듣자마자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남았냐고 의사를 들들 볶는다. 의사 섀런(밀라 쿠니스)은 홧김에 이렇게 내뱉는다.

“90분!” 이럴 수가. 남자는 뛰쳐나간다. 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그는 인생에 남은 90분 동안 가족과 화해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앵그리스트맨’은 이 남자 헨리(로빈 윌리엄스)의 90분 동안의 발걸음을 쫓아가며 인생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우리 사회에 포진해 있는 수많은 분노를 유쾌한 방식으로 언급하면서도 그 분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게 하는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영화다.” 메가폰을 잡은 필 알덴 로빈슨 감독의 말이다. 늘 화만 내는 불만투성이 아저씨 헨리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고 순식간에 달라질 리는 없다. 그런데 그 모습은 밉기보다는 애잔하다. 헨리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로빈 윌리엄스이기 때문이다.

사실 ‘앵그리스트맨’의 헨리는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 이력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역할이다. 스크린에서 그는 대개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아버지이자 교사였고, 아이들보다도 동심을 더 잘 아는 듯한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30년 가까운 연기 이력에서도 로빈 윌리엄스가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던 건 1990년대다. 그 무렵의 그는 ‘폭발’이란 말 외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를 쏟아냈다. 90년대 한국의 초등학생, 아니 당시 국민학생도 그에게 열광했다. 여장 남자의 천방지축 코미디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혼한 아내가 데려간 세 아이를 무척 사랑하는 주인공 대니얼이 된다. 궁리 끝에 여장을 하고 아내의 집에 가정부로 취직해 여장 남자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몸개그를 펼쳐 보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서툰 솜씨로 요리를 하다 가슴 부분의 보형물에 불이 붙어 난리법석을 떠는 장면은 봐도 봐도 배꼽이 빠질 것만 같았다. 우리 아빠도 저렇게 웃기고 자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삼킨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로빈 윌리엄스를 할머니로 보이게 한 할리우드 분장 기술도 대단했지만 천연덕스럽게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그의 연기는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그 영화를 거듭 본 아이들이라도 비슷한 시기 개봉한 애니메이션 ‘알라딘’(1992, 존 머스커·론 클레멘츠 감독)의 램프 요정 지니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쉽게 상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목소리 연기의 귀재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영화에 여럿 출연했다. 그럴 때의 그는 아이들을 나무라고 훈계하는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과 같은 마음을 지닌 어른이었다. 현실에 안착한 지금과 달리 자신이 과거 피터팬이었음을 깨닫고 모험을 떠나는 배불뚝이 아저씨(‘후크’, 1991,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어렸을 적 보드게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가 26년 만에 돌아와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른(‘쥬만지’, 1995, 조 존스톤 감독), 겉모습만 어른일 뿐 아이였던 남자(‘잭’, 1996,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가 바로 그랬다. 이를 연기하는 로빈 윌리엄스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정말 ‘노는’ 것처럼 보였다. “로빈의 코미디는 번개와도 같았고, 그 때문에 웃는 우리들의 웃음은 천둥과 같았다(스티븐 스필버그, 2014년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뿐이랴. 그는 어른 노릇을 할 때도 여느 어른과 달랐다. 오로지 대학 입시만을 생각하며 경주마처럼 달리던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그는 갑자기 교단 위로 뛰어 올라가 마음을 흔들어 놓는 선생님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1989, 피터 위어 감독)의 존 키팅 선생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라”고,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신념의 독특함을 믿어야 한다”고. ‘굿 윌 헌팅’(1997, 구스 반 산트 감독)에서도 그는 품이 넒은 교수였다. 시나리오를 함께 쓰고 출연한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을 스타로 만들어 준 이 흥행작에서 정작 사람들을 울린 건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털북숭이 교수 숀이었다. 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지만 천재적 재능을 지닌 청년 윌(맷 데이먼)이 어린 시절 상처받고 학대받은 기억에 힘들어하자 그는 이렇게 달래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웃을 때면 바보처럼 해사해지는 표정, 더 재미있는 일을 예고하는 듯한 눈웃음, 언제고 재치 있는 농담을 쏟아낼 것만 같은 큰 입. 행복 바이러스를 흩뿌리고 다니는 듯했던 로빈 윌리엄스는 뜻밖에도 한때 코카인에 절어 살았고, 알코올 중독으로도 고통을 받았다. 그 때문에 외롭고 힘든 싸움을 겪어왔으면서도 연기에서만큼은 늘 모자람이 없었다. ‘따뜻한 코미디’란 장르가 있다면 그 장르의 으뜸가는 장인이었다. 젊은 시절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약했던 그는 애드리브에도 능했다. ‘알라딘’에서 지니의 대사는 시나리오가 따로 필요 없었다. 대부분 로빈 윌리엄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가를 스크린에 확인시킨 초기작 ‘굿모닝 베트남’(1987, 베리 레빈슨 감독)의 프로듀서 마크 존슨은 이렇게 말한다. “로빈 윌리엄스를 대체할 사람은 없다. 그의 창의력, 재빠름, 재기 발랄함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극 중 라디오 녹음 장면을 찍을 때면 우리는 그냥 카메라가 로빈을 찍도록 했다. 그가 모든 걸 창조해내니까.”

그의 영화를 보며 깔깔댔던 국민학생들이 20대가 되고 그의 격려에 감동한 고등학생들이 30~40대에 접어든, 그러니까 2000년대 들어 로빈 윌리엄스는 이전과 사뭇 다른 역할에 도전하곤 했다. ‘스토커’(2002, 마크 로마넥 감독)에서 그는 지독히 외로운 사진 현상소 직원 싸이가 되어 한 가족을 스토킹 했고, ‘인썸니아’(2002,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에서는 그의 연기 인생 처음으로 살인범을 연기했다. 이 두 인물은 외로움이란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악역임에도 왠지 애처로웠다. 그는 인물이 저지르는 악행의 바닥에 깔린 외로움과 분노를 이해했다. “그가 살인범으로 출연하는 걸 보고 놀란 사람이 많았을 거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미지와는 180도 다르면서도 그는 그 인물을 완전히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했다.”‘인썸니아’를 함께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말이다.

로빈 윌리엄스는 그의 활약과 함께 성장한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됐다. 자상하고 재미있는 아빠였고 아이들보다 철없는 아저씨였으며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하는 선생님이던 그는 떠났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아이들을 이렇게 다독여주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디서든 연결되는 거야.” 그리고 ‘앵그리스트맨’에서 죽음을 앞둔 헨리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갈 때 후회 없는 놈은 바보나 싸이코패스야. 난 후회가 차고 넘친단다. 널 사랑한다고 꼭 말해야겠다. 더 늦기 전에.”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우리의 캡틴에게, 우리의 지니에게.

‘앵그리스트맨’의 로빈 윌리엄스에 대한 말말말

- 밀라 쿠니스(의사 섀런 역) “10여 년 전 TV 쇼 촬영 녹화장에서 로빈 윌리엄스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의 위상이 대단했는데도 나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렴. 왜냐하면 이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거든. 그리고 마음껏 즐겨라.’ 그가 해준 말이다.”

- 필 알덴 로빈슨 감독 “헨리는 치료 불가능한, 어떻게 보면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까지 비치는데 로빈 윌리엄스는 그런 인물을 연기하는 것에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그는 연기할 때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배우다. 그것이 그의 연기를 다른 이의 것과 비교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다.”

글= 임주리 매거진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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