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50조 엔 금융사들 쟁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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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카이(團塊) 머니를 잡아라.'

전후(戰後)인 1947~1949년에 태어난, 이른바 '1차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 시기가 다가오면서 이들의 퇴직금을 겨냥한 일본 금융사들 간 쟁탈전이 벌써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들 세대는 다른 해에 비해 인구가 20~50% 많은 700만 명으로, 잘 뭉치는 이들의 특성을 빗대 '덩어리'를 뜻하는 '단괴'란 표현을 쓴다.

◆ 퇴직금만 50조 엔 될듯=2007년부터 3년간 60세 정년을 맞이하는 정사원은 200여만 명. 이들은 1인당 평균 2000만 엔(약 2억원)가량의 퇴직금을 손에 쥐게 된다. 다이이치(第一)생명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매년 15조 엔 정도의 퇴직금이 지급될 것으로 추정됐다. 이들의 퇴직금을 모두 합하면 50조 엔에 달한다. 웬만한 대형은행의 총예금규모 수준이다. 여기에 앞뒤로 1~2년을 더할 경우 그 액수는 70조~80조 엔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단카이 세대가 현재 보유 중인 금융자산 110조 엔을 합할 경우 '단카이 머니'는 약 160조~190조 엔에 달할 전망이다. 새로운 금융시장이 하나 생긴다고 할 정도의 큰 파괴력을 지닌 변수가 일본 금융시장에 등장하는 것이다.

◆ 분주해진 일본 금융사들=4일 오전 도쿄 긴자(銀座) 한복판에 위치한 미즈호은행. 50대 후반의 한 중년 고객이 은행에 들어서자 안내직원이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고객의 통장과 용건을 확인한 행원은 "이건 조금 특별한 경우입니다만…"이라며 안쪽에 마련돼 있는 'VIP룸'으로 고객을 안내했다. 원래 이 은행의 VIP 대우는 예금액이 1000만 엔 이상인 고객에 한해서다. 그러나 최근 내부방침이 바뀌었다. 단카이 세대에 한해 500만 엔 이상으로 하한선을 낮춘 것이다. 은행 관계자는 "이들이 2~4년 후 받게 될 퇴직금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 은행은 또 최근 단카이세대를 대상으로 "은퇴하면 어떤 생활을 하고 싶은가""자금 운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인가" 등의 설문으로 다양한 분석을 해 그 결과에 맞는 상품을 개발 중이다.

증권사와 투신사들도 바빠졌다. 온라인 증권사인 가부닷컴증권은 이달 들어 60세 이상 고객의 거래수수료를 할인해 주는 제도를 신설했다. 단카이 세대를 주식시장으로 미리 유인하겠다는 전략이다. 일본에서 영업 중인 미국의 투신운영사 뱅거드 그룹은 60세 정년 이후 초기에는 주식 등 위험자산에 투자하다 고령이 될수록 안정자산인 채권 쪽으로 옮겨가는 금융상품인 '라이프 사이클형 펀드'를 개발했다. 고령화할수록 안정투자를 원하는 단카이 세대를 겨냥한 상품이다.

노무라(野村)증권 관계자는 "'인생 80'으로 봤을 때 60세에 정년퇴직하는 이들은 투자자로 치면 '젊은이'에 속한다"며 "이들의 거대한 자금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금융시장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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