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트 최후의 회고록 제2부 「내가 알고 있는 것들」(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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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돌을 트럭에 싣는 작업이 중단된 것은 우리가 규정을 어기고 관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선창 사람들은 주장했다. 무슨 소린가 했지만, 찬찬히 들어보니 딴은 그럴 듯했다. 얘긴즉슨,나일강 강 안에 있는 모든 선창들엔 각기 책임자가 한 사람씩 있는데, 이들은 선창을 지키고 관리하는 댓가로 이곳에 들르는 배나 부려놓은 화물을 실어가는 차량들로부터 일정한 선창 사용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알고 보니 「하지」란 이름의 선창관리인은 공교롭게도 얼마 전부터 몸져누워 사무를 보지 못했다.
아랫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작업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사흘째야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선창에 나왔으나 트럭책임자인 내가 보이지 않자 작업을 중단시켜버린 것이었다. 「하지」는 체구와 태도가 의젓하고 당당한 50대의 거한이었다.
첫눈에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알라신의 이름으로 공손히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곧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선창을 사용할 때 책임자에게 허가를 받고 정당한 댓가를 치를 생각은 하지도 않으셨단 말입니까?』
나는 그런 규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변명했지만 그는 거듭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래도 저는 집에서 이틀을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나와서 작업을 금지시킨 겁니다. 당신과 얘기가 끝날 때까지 트럭도 압류토록 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하지」에게 이렇게 야단맞고 있으면서 내 마음속엔 그에 대한 반발감보다는 찬탄과 존경심이 샘솟앗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집트인이 아닌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와 긍지를 결코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는, 자랑스러운 이집트인을 또 한사람 발견했다는 기쁨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다. 그래도 한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잘 알겠습니다. 작업중단 조처에는 승복합니다. 하지만 트럭압류는 좀 지나친 것 아닙니까? 당신처럼 분별 있으신 분이라면 빈 트럭을 제게 보내 제가 이리로 오도록 했어야 할겁니다.
그러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린 물질적 손해를 봤을 뿐 아니라 일이 늦어져 우릴 고용한 사람들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소. 내가 월권행위를 한 것 같군요. 재 잘못으로 손해를 끼쳤으니 보상해 드려야죠. 선창사용료를 계산할 때 두짐 몫은 빼 드리겠습니다.』
두짐이란 배가 두 번 싣고 오는 만큼의 돌의 양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와 나는 십년지기처럼 친해졌다.
연석운반업자로 마스구나촌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유지 대접을 받았다. 거처도 차고 바로 위층에 있는 빈방을 세내 옮겼다. 많은 마을사람들과도 친해졌지만, 내 정체를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나는 「엘·하지·모하메드·누르·엘·딘」이라는 길다란 가명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머리가 너무 길었다싶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이발사를 찾았다. 그 동안 나와 친해진 이발사는 내 머리를 가위질하며 끊임없이 얘기를 주워섬겼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짤막하게 응수하곤 했다.
그러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군 차량이 한대 나타나 이발소 앞에 멎더니, 정복장교 하나가 들어와 앉았다.
이발사가 인사하는 품으로 봐 서로 잘 아는 사이 같았다.
알고 보니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늘상 이 집에 와서 머리를 자른다는 것이었다.
탈옥 후 턱수염을 기르고 옷차림도 완전히 바꾸었지만 군인과 맞닥뜨리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러나 그 장교는 나를 알아보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거꾸로, 나는 전혀 보이지도 않는 듯 무시해버리고 내 머리를 다듬는 이발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발을 마치고 나는 황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다음날 저녁때,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할 때였다. 코피숍을 지나면서보니 이발사가 마을파출소의 경관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무언가 심각하게 수군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내가 인사를 건네자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식당으로 계속 걸어갔다.
무얼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끝낸 후 숙소로 돌아왔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다음날 아침, 불안감을 잊기 위해 일찍부터 일어나 일부러 분주스럽게 일했지만 무슨 찌꺼기처럼 마음 깊숙이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날 저녁 일이 끝난 후 나는 이발소로 찾아갔다. 이발사와 직접 대면해 쿵하든 쾅하든 확실한 것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쾌활히 나를 맞았다.
머리 깎은 지 하루밖에 안돼 또 다시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입을 열기도전에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모하메드」씨. 저는 속이지 못해요!』
순간 나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각오했던 상황이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말문이 콱 막혀버렸다. 『어제 왔던 그 장교가 당신을 알아봤어요. 당신도 군인이라죠? 그 사람이 모든 얘길 해주더군요.』
그러다가 두려움에 찬 내 표정을 눈여겨본 이발사는 곧 나를 안심시켰다. 『걱정마세요. 어제 코피집에서 만난 경찰관에겐 아무소리도 안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나라를 위해 용기 있게 투쟁해온 얘길 듣고 보니 더욱 존경스러운걸요. 어제 그 장교도 대단히 칭찬합디다.』
(주=1944년10월 두번째로 탈옥한 「사다트」는 화물트럭 일등을 하면서 1년 가까이 숨어살다가 45년9월 정부가 계엄령을 해체하면서 그에 대한 영국당국의 구치명령도 취소돼 자유의 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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