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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초대내각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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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각과 국회의 미숙하고 뒤죽박죽인 일 처리, 끊임없는 잡음, 그리고 건국초의 혼란에서 비롯된 사건들이 내각의 안정을 흔들었다. 내각구성 2개월만에 절도사고로 민희직 교통장관이 물러났다. 윤치영 내무·전진한 사회·장택상 외무·조봉암 농림·이인 법무·임영신 상공·윤석귀 체신이 모두 10개월 안에 교체됐다. 이런 퇴진들은 자리를 둘러싼 다툼에 연유한 것도 적잖았다.
내각은 안과 밖에서 끊임없는 공격에 부대꼈다.

<한민당의 공세>
이인씨는 장관들의 미묘한 경쟁관개를 이렇게 들려주었다.
『48년12월 상순, 그러니까 내각구성 4개월쯤 후의 어느 날 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나와 지시를 끝내고 나가면서 <총리가 겸직으로 분주하고 국방이 중요하니…> 그러곤 잠시 틈을 두었다가 <이 법무장관을…>라고 말하곤 끝을 맺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이범석 총리가 나를 보며 <사람이 바빠서 살수 없으니 겸직을 면하고 국방전임이 되도록 해주시오>라고 했다. 다른 장관들은 <건국초에 내각이 계속 동요되면 안되니 그런 생각 말라>고 했다.이런 일이 있은 뒤 장관들의 나에 대한 태도가 다소 이상했지만 개의치 않고 바쁘다고 자리를 비우는 총리를 대신해 국무회의·의장 대역을 해왔는데 이듬해 봄 이윤영 사회부장관이 <장관들은 모두 마찬가지니 의장대리는 윤번제로 합시다>고 했다.』
당시의 이 총리에 대한 대통령의 진의를 뭐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측근들은 그 무렵의 이 총리에 대한 모략에 비추어 총리 아닌 국방을 내놓으라는 암시였으리라고 했다. 이 총리는 수도사단·정훈국·제4국(대북공작)신설을 업적으로 자주 내세웠다. 그러나 수도사단을 만들고 사단장을 심복인 이모씨로 앉힌 것이 모략의 자료가 되었다는 것.
당시의 얘기는 신성모 씨가 이런 사실을 들어 <총리는 수도사단을 수중에 넣고 각하의 침소를 포위하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모략했다는 것.
신씨는 영국 상선선장으로 망명생활의 이 박사를 도왔다. 그가 이 박사의 기억에 더욱 뚜렷이 남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덕도 있다. 비서였던 박용만 씨의 회고. 『건국초엔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숱한 단체의 책임자, 자칭 독립투사 등.
대통령이 면담에 너무 시간을 뺏겨 매주 목요일을 민성일로 해 일반면회자를 만났다. 그런 때인데 시골 할머니가 민성일에 찾아왔다. 그녀는 느닷없이 대통령에게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있는데 대통령이 <아들이 누구요>라고 물었다. <내 아들이 신성모 아입니까> 대통령은 「신성모」라는 이름을 몇 번인가 입속에서 외더니 <아! 그 캡틴신, 선장하는 신성모> 그러더니 <내가 불렀으니 곧 돌아올 것>이라고 그 할머니께 알려주었다.
그런데 신씨의 귀국은 허정 씨가 대통령께 건의했고 그런 연고로 귀국 후 한민당과 가깝게 지내며 그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씨의 첫 직책이 통합청년단(한청)의 단장으로 당초 통합에 소극적이었던 족청단장 이 총리와 미묘한 사이가 되었고 그 얼마 뒤엔 역시 총리의 겸직이던 국방을 신씨가 맡게 된다.
초대내각에서 이 총리·윤치영·임영신 등이 한민당과 소원한 사이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임영신 씨의 비서였던 Y씨(현 중앙대재단이사)의 얘기. 『초기 한민당분들은 이 대통령 측근진을 자기네 얘기를 잘 듣는 사람으로 바꾸려고 애를 썼다.
할머니(임영신 씨를 말함)나 윤치영 씨가 그들과 정치적 배경이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김도연, 이인 장관 등과는 얘기하는 내용이 다른 것이 많았다. 당시 한민당쪽의 내각에 대한 공세는 정책적인 것보다는 대통령 주변의 인적구성을 바꾸려는 노력이었다고 뒷날 할머니는 얘기했다.』
건국초엔 모두가 지사로 자처했고 저마다 포부를 펼 수 있는 자리를 원했다. 비단 한민당만이 아니라 대통령과 연결되는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인물을 평하고 천거하고 했다. 국내사정 특히 국내의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낀 대통령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흔히 좋은 사람을 추천하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다.
초대 법제처장이던 유진오 씨의 회고. 『언젠가는 느닷없이 대통령이 내게 <상공부 누가 했으면 좋지>라고 물어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흐리고 말았다. 그 직후 중앙청 복도에서 총무처장이던 전규홍 씨를 만나 <대통령이 내게 상공장관 누굴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라고 했더니 <뭐라고 했어>라고 반문했다. <누굴 추천해. 당장 생각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정치할 아니고…><잘했어.>

<"인물 추천하라">
대통령은 아무나 붙들고 그러는데 뭘…>라고 했다. 이런 이 박사의 인물 추천 요구에 많은 사람들이 <이 박사가 나를 가장 신임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추태를 많이 부린 것 같다. 이 대통령은 특별한 의도나 신임이 있어서 물은 것이 아니라 기분 내키는 대로 물었다.』
대통령이 인물을 추천하라고 했다해서 그것이 반드시 신임의 표시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인재를 아꼈고 그런 인재에게는 진정한 신뢰와 기대를 이승만 특유의 방식으로 표시했다. 따라서 인물추천은 광범하게 구했다. 비서였던 윤석오 씨는 『사람들이 누굴 추천하면 이를 메모해 몇 사람에게서 공통된 평가가 무엇인가에 대해 세밀히 검토를 했다』고 했다.
이 박사는 갑작스레 사람을 썼듯이 역시 잘못이 알려지면 가차없이 해임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적어. 그래서 대개 추천을 받아 장관으로 임명하는데 잡음이 많아. 그 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부정이야.』 이 박사는 늘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유진오 씨는 조각당시 언젠가 이 박사는 『내가 앞으로 누구누구를 장관으로 임명하지만 잘못하면 자꾸 바꿀테야』라고 말했던 일을 기억에 떠올린다.
이런 이 박사의 생각은 그러나 대단한 폐단이 되었던 것 같다. <잘못만 들춰 고자질하면 갈아치운다>는 풍토를 자초했고 그래서 초기의 내각주변에 다툼과 잡음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그리고 이런 풍토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느새 측근들은 <장관들은 일을 잘하고 있고 모든 것이 잘돼가고 있다>는 말만을 할 사람이외엔 대통령에게 접근시키지 않는 「인의 장막」의 원인이 되었을까.
또 다른 유형은 장택상 외무의 경우다. 장 외무의 사임은 「프란체스카」여사와의 불화 때문도 한 이유였다고 장씨는 회고했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외교문서의 영어가 틀리는 일이 많다면서 외국인 타이피스트 2명을 외무부에 보냈다.
나는 당장 쫓아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어 차관실 옆방을 마련해주기는 했지만 일은 보내지 말라고 엄명했다.
결국 한 달이 넘도록 일거리가 안오자 그들은 스스로 봇짐을 쌌다. 그런데 48년12월 대통령은 정환범 씨를 주중특사로 발령하라는 얘기였다. 정씨는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이긴 하지만 8·15전의 중국생활에 큰 흠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 어떤 경로로 접근했나 알아봤더니,「프란체스카」여사의 추천이었다.

<장택상의 사표>
나는 <그 사람은 중국인들에게 나쁜 인상을 준 사람>이라고 설명, 적임자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어느 날 대통령이 불렀다. <필리핀은 윤치영이 보고 가라고 그랬는데 영국에는 외무장관이 좀 가야겠어><시찰입니까><아니 대사로…>나는 미리 준비해 갖고있던 사표를 내놓았다.

<그게 뭔가><사표입니다><사표라니…><외무장관 사표입니다><이거 왜 그러나?><가정 사정으로 못하겠습니다. 영국에는 딴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지금은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일어서 나오려니까 대통령은 <좀 기다리게>라고 만류했다. 했지만 그대로 나와버렸다. 그 얼마 뒤 「존슨」등 외국기자들이 찾아와 <영국엘 안가면 그만이지 외무장관 사표는 왜 냈느냐>고 묻기에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무위원 임면권은 있지만 국민을 오스트리아스(국외추방)할 수는 없는 법이오>라고 말해 주었다.』
아뭏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박사의 초기는 각료변동이 너무도 잦았다. 이런 인사정책을 초대 문교장관이던 안호상 씨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박사는 국가운영이라는 안목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눈이 있었다. 확실히 특출했다. 그러나 그도 끝내 독립투사였지 독립국가의 주석은 못되었다. 해외독립투사들이 모두 그렇듯이 자기와 노선이 조금만 틀려도 습관적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독립투사시절이야 살아남기 위해서도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대통령이라면 아래에서 잘못이 있더라도 감쌀 수 있어야하는데 이 박사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조병옥 씨 같은 이는 <사람을 곶감 빼먹듯이 빼먹고 싫으면 버리니 누가 남아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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