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25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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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람이 살아가다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은 아마도 본의 아니게 앞뒤가 어굿난 언행을 하지 않을수 없는 경우일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를 여려번 겪었다.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가보자. 나는 정치적 활동을 하면서, 이집트를 지배하고있던 영국점렴군 당국에 저항했었다. 저들의 눈엔 불법적 활동이었던만큼, 언제든 체포돼 몇년씩이나 감옥에 갇힐지 모른다는 각오도 돼있었다. 나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들어갔다. 그런데 이 모든 운명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있었으면서도 정작 그것이 닥쳤을때 나는 반항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점령영국당국의 명으로 체포된 나는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외국인용 감옥에 갇혔다.정치범들이란 집권정당에 적대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붙들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얼마후 반대당들이 득세하자 이들은 곧 풀려났다.
하지만 나만은 예외였다. 왜 안놓아 주느냐고 따지자, 영국당국이 명령한 체포인만큼 석방도 그쪽 지시없이는 할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더이상 참고 견딜수 없었다. 영국인들의 손아귀에 내 운명을 버려둘 수는 없었다. 나는 탈옥계획을 세웠고, 쉽게 성공했다<주·제1부19∼21회참조>.
감옥을 빠져나온 나는 정치경찰에 되붙잡히지 않으려면 종적을 감추어야할 입장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손쉽게 수도를 벗어나 이집트 내륙 깊숙이 들어가 들판이나 산동굴속에 숨어 세상의 눈을 피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카이로에 남아있어야했다. 뿐만아니라 아침마다 은신처를 나와 우리 가족이 먹을 식량을 구해야했다. 돈이라곤 있을 턱이 없었다. 집안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도움을 얻을만한 형제 친척도 없었다. 또 설사 경제적으로 보태줄 사람이 나섰다해도 내자신이 남에게 짐되기를 거절했을 것이다.
탈옥수 신세였지만 먹고살기 위해선 어디선가 일자리를 찾아야했다. 수소문한 끝에 잡은 일자리는 카이로중심부, 정치경찰과 영국당국의 주구들이 도사리고있는 곳에서 불과 몇발짝 떨어진곳에 있었다. 낡아빠진 털터리화물트럭의 운송책임자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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