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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2030 일터에서

"꿈만 먹고 살라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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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 최진욱 한국영화조수 연대회의 사무국장

120억원짜리 영화에서 스타급 주연배우가 5억원을 받는 것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일까.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영화제작사와 매니지먼트사 간의 갈등을 두고 한 배우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5억원의 1년 금리 정도인 금액이 같은 촬영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 10명의 인건비에 해당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일일까.

영화 한 편이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국제영화제에서 연달아 상을 타 언론이 떠들썩해질 때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뿌듯한 감정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스크린에 나오지 않는 무수한 스태프들의 고생을 생각하면 빛 좋은 개살구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영화 일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10대 후반의 때 이른 나이였다. 마침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놀러갔다가 그날로 조명부에 합류했다. 원래 영화를 좋아했던 터였다. 게다가 연예인도 볼 수 있고, 밥도 먹여주고, 촬영 현장을 따라 여행도 하고, 괜찮은 일이다 싶었다. 보수를 얼마나 받는지, 계약조건 따위는 생각도 못했다.

첫날부터 꼬박 일주일을 밤을 새우며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지금은 덜하지만 당시에는 '각개모찌'라고 해서 여러 작품을 같은 기간 안에 연달아 찍는 경우가 허다했다. 체력적인 한계도 한계지만 제일 힘들었던 건 졸음을 참는 거였다. 조명기 스탠드 옆에 서 있다가도 졸고, 잠시 라인 정리 작업을 하다가 쪼그려서 졸기도 했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이렇게 멍하니 긴장을 늦췄다가는 선배들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식사야 워낙 들쭉날쭉이어서 때를 놓쳐 온종일 굶기도 하고, 몇 시간 만에 세 끼를 몰아 먹기도 했다.

이렇게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풀릴 때면 하루에도 수십 번 도망쳐 버릴까 생각했다. 물론 촬영이 끝나고 새벽에 밥 반 술 반으로 하루를 정리하다 보면 오늘도 끝냈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꼈지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도 일주일씩은 몰라도 2, 3일은 꼬박 새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배들의 예전 얘기를 들어보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묵묵히 일했던 이들의 노력이야말로 한국영화산업 발전의 밑거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일하는 스태프들에 대한 처우는 어떨까. 지난해 한국영화조수연대회의 조사에서 스태프의 연간 수입은 평균 640만원 정도로 나타났다. 실제 현장에서는 직급이 내려갈수록 훨씬 적어진다. 일반적으로 영화 스태프는 '계약금+잔금' 형식으로 하도급 계약을 한다. 예컨대 한 작품에 참여할 때 촬영.조명 등 팀당 3000만원에 계약을 하면, 이 중 절반쯤인 1300만원 정도를 제1 스태프가, 다시 그 반쯤인 700만원 정도를 제2 스태프가 가져가는 식이어서 마지막 제4, 5 스태프에 이르면 250만원 정도를 받는다.

이 하도급 계약의 특성상 촬영 기간과 업무량이 늘든 줄든 받는 돈은 똑같다. 초과수당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영화 한 편을 찍는 데 짧게는 4~5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리니까 영화 한 편에서 받는 돈이 곧바로 연수입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자연히 최저생계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스태프가 대다수다. 4대 보험은 전무후무하다.

현실이 이런데도 스태프 지망생들은 "무조건 일만 시켜주세요"하며 찾아온다. 졸업작품을 만드는 영화학과 학생들과 토론을 벌인 적도 있는데, 역시 결론은 "고생 한번 해보고 싶어요"였다. 영화 현장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이 만들어낸 열정 때문이다. 하지만 내 주변에서는 이런 인력 대부분이 짧게는 몇 개월,길게는 몇 년을 못 버티고 현장을 떠났다. 일자리는 한정돼 있는데 일하겠다는 인력은 많아 이 열악한 작업의 기회마저도 쉽게 보장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1년에 많으면 70여 편이다. 연출.촬영.조명.제작 등 각 팀의 감독급 스태프가 5명 정도라고 보면, 연간 고용 규모는 350명 수준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영상 관련 학과에서만도 매년 수천 명의 인력을 배출하는 점을 감안하면 각 팀의 막내로 시작해 감독급이 되는 길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다.

이런 열악한 현실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흔히 '영화인은 꿈을 먹고 산다'고들 한다. 하지만 꿈만 먹고 어떻게 사나. 밥도 먹고, 결혼도 하고, 부모님 생신에 작은 선물이라도 보내고, 병원도 가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우리보다 영화산업의 후배 격인 태국도 하루 근로시간과 적정임금이 산정돼 있는데 왜 유독 한국영화산업은 꿈만 먹고 살아야 할까.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때가 왔다. 배우들의 출연료나 지분 참여를 두고 논란이 많은데, 그 출연료가 낮아진다고 곧바로 스태프의 급여가 높아진다고는 보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차근차근 접근해야 한다. 프랑스 월간지'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인 이냐시오 라모네의 말처럼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이제 꿈도 먹고 밥도 먹자. 다른 나라도 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