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4. 땡볕 <19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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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어쨌든 보병은 전투를 앞에 두고 작전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 될수록 입을 다물고 간밤에 꾼 꿈 얘기 같은 것은 더욱 숨기고 제 장비나 점검하면 되었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든 관심이 없었다. 지프가 급히 커브를 틀 때마다 영규는 납작 엎드리거나 총좌를 껴안거나 하는 게 더욱 급했다. 그는 우선 차가 서게 되면 수통부터 채워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클로르칼키 냄새가 나지 않는 취사부의 우물물이라면 운이 좋을 것이다. 안영규 상병은 볕에 그은 얼굴에 가늘고 길다란 눈이 날카로웠다. 입술은 하얗게 말라붙었고 볼이 패었다. 머리가 자랄 대로 자라나 목덜미를 덮었고 밤송이 같은 수염이 강퍅한 턱 밑에 듬성듬성했다. 그의 작은 갈색의 몸이 느슨히 풀려 있을 때에도 눈은 쉴 새 없이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에도 감동하지 않고 고통이나 분노마저 겉에 드러나지 않는다. 감정이 볕에 새까맣게 그을어버린 것이다. 살육과 갈증과 더위가 모든 전투원을 단 보름 동안이면 그렇게 찌그러뜨리고 두들겨서 타버린 빈 깡통처럼 변화시킬 수가 있었다.

나중에 갑작스런 전속 명령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전선에서 보내온 내 편지의 겉봉에 씌어있던 부대 주소에서 내가 최전선의 위험한 복무를 하고 있다는 눈치를 챘던 것이다. 어머니가 떠올린 것은 서해바다 백령도에서 중령인가 대대장인가로 근무하고 있다던 동네 청년이었다. 그녀는 일단 그 댁을 찾아가 정확한 주소지를 알아낸 다음에 인천으로 가서 그 무렵에는 한 달에 두어 번 있을까 말까 했던 부정기 연락선을 어렵사리 얻어 타고 백령도로 갔다. 그는 큰 매형의 고등학교 동창생이기도 했고 누나들도 그를 잘 알았다. 어머니가 민간인은 함부로 오갈 수 없던 서부전선의 최전선인 백령도 부대로 그를 찾아가자 그는 놀라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주월사령부를 통하여 나의 전속을 어떻게든 주선해 보마고 약속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 전 해의 연말이었으니 꼭 두 달 전이었단다. 나는 출라이에서 미군 기지 파견근무의 경력도 있었으므로 다낭의 한미월 '합동수사대' 파견이 별로 어렵지는 않았던 듯싶다.

내가 전선에서 극한적인 인간 조건과 죽음, 그리고 폭력과 야만을 즉물적으로 보고 느낀 것에 그쳤다면, 다낭 암시장의 조사원 노릇을 하면서 비로소 미국이 벌인 전쟁의 총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게 된다. 나는 몇 년 전에 '무기의 그늘' 프랑스 판을 냈는데 마침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2차대전 이후 미국이 비서구권에서 벌인 전쟁의 성격은 오늘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속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 종교적 문화적 인종적 편견에 의한 전쟁,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사업 즉, 비즈니스로서의 전쟁입니다.

나는 합동수사대로 가자마자 처음에는 PX를 파악하는 근무에서부터 시작했고, 그 다음에 미군 보급창을 출입하다가, 드디어 다낭 암시장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거대한 '도깨비 시장'의 한복판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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