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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만들기와 문화강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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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5000년간 우리 민족은 한반도라는 지리적인 조건 속에서 독특하고 뛰어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 왔다. 우리 민족의 문화와 예술의 우수함은 과거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열강의 문화재 침탈 사실과 현재에도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박물관.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수많은 문화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즘 들어 우리 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알릴 수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은 여전히 부족한 게 현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박물관.미술관 설립에 관한 정책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지키기에 부족한 면이 있어 그 개선책에 대한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

박물관(미술관) 등록은 2003년 5월 이후 지방자치단체로 이관돼 그 절차가 조금은 수월해졌다. 특히 1종 박물관(미술관)의 경우 100여 점 이상의 소장품 보유와 일정시설을 갖추면 등록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 '100여 점의 소장품'이라는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

숫자 규정이 엄격하다 보니 국보나 보물급의 값진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개인들이 숫자가 적어 특색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러한 보물급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개인들은 뛰어난 문화재를 갖고 있음에도 도난 방지나 기타 귀찮은 일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부분 공개하지 않고 집 안 깊숙한 곳이나 은행 금고 등에 보관하고 있다.

볼 수 없고 공개할 수 없는 문화재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가치가 있어 오히려 볼 수 없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게 현재 우리 문화재 세계의 현실이다. 장물처럼 이렇게 숨겨진 문화재들이 본래 위치를 획득해 모든 사람이 함께 보고 그 우수성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박물관 개설을 위한 100여 점이라는 수치적 기준의 수정이 요구된다. 100여 점이라는 수적 규정이 아닌 보다 객관적이고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비록 소수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더라도 그 소장품의 가치가 뛰어나다면 소장품의 수량에 관계없이 특수한 박물관.미술관으로 설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장롱 속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한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우리 국민의 곁으로 나올 수 있게 되며 특정인 혼자가 아닌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국민이 함께 훌륭한 작품을 수시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일반 대중의 문화 감상의 폭과 기회를 넓혀 줄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박물관.미술관이 설립됐을 때는 국가가 그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리.보관하는 데 관여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물관으로 개장되면 정규 학예사를 파견하거나 몇 개의 소규모 박물관을 함께 관리하는 공동 학예사를 임용해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관리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4장 13조와 제7장 24조에는 '등록된 박물관.미술관에 대하여는 설립에 필요한 경비, 그리고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예산의 범위 안에서 각각 보조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실제 예산정책에 있어서는 매우 인색한 실정이다.

지방마다 특색있고 수집.소장자들의 특색이 살아 있는 박물관.미술관은 그 자체가 소장 문화재와 함께 한국 예술과 문화의 가치를 높이는 기초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박물관.미술관 설립 규정 개정을 통한 진입장벽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더 많은 박물관.미술관 만들기 운동이 이뤄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한 문화의 장이 열리고 문화대국으로의 진입이 더 쉽게 이뤄질 것이다.

우제길 화가.우제길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