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왕국(7)|사우디의 권력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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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75년「파이잘」의 암살 직후「할리드」황태자가 왕에 즉위했을 때 외부세계에서는 보다 박력 있는「파하드」왕자가 들어설 때까지 잠정적으로 왕이된「임시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오늘「할리드」의 특징 없는 스타일이 오히려 현대화의 변천에 대한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는데 주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문제는 왕의 건강이다.
그는 심장수술을 받았다. 왕은 그의 병약 때문에 공식 행사를 기피하고 사막에서 매사냥을 자주 즐긴다. 이런 모습을 보고 서양기자들은 「할리드」가 간판에 지나지 않으며 실권은 동생인「파하드」황태자가 쥐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81년 4월 영국수상「마거리트·대처」여사는 리야드 방문중「파하드」황태자와 첫 면담을 가진 후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수상은 보좌관을 돌아다보며『그 작자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자라고요? 자기 말은 한마디도 못하더군』하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대처」여사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파하드」황태자는 두 번째 면담 때 어찌나 많은 이야기를 했던지 예정된 l시간을 훨씬 넘어서야 면담이 끝났다.
두 번째 면담이 첫 번째와 그처럼 달랐던 것은 첫 번째가 형「할리드」왕의 면전에서 이루어진 반면 두 번째는 단독면담이었다는 점이다. 왕의 면전에서 그는 왕이 묻기 전에는 입을 떼지 않기 때문이다.
75년부터 이 석유부국의 실권을 잡아온「파하드」황태자는 교육상·내무상 등 중요 각료직을 맡아오면서도 늘 형의 그늘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81년에 60세가 된 이 인물을 외국기자들은「사우디아라비아의 강자」라고 지칭하지만 형의 앞에서는 늘 안절부절못하고 신하로서의 복종으로 처신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거둬들이는 엄청난 석유부를 가지고 사우디아라비아 사회를 현대화하면서도 그 변천과정에서 왕가가 밀려나는 일이 없도록 변화를 주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60년대 말께 그는 자기가 언젠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이 되리라는 사실를 인식한 것 같다. 당시의 왕「파이잘」은 늙었고「할리드」는 병약했던 반면 그는 그때 40대의 장년이었다.
그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때문에 느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청각기재를 구해 독학을 시작했다.
같은 방법으로 은행가와 경제전문가들로부터 경제 문제를 익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대화를 지휘하고 있는 그는 부하들을 부드럽게 다룬다. 75년 조각 때 입각한 장관들의 대부분이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입증하듯 그는 각료가 일을 잘못 처리하면 해임하는 대신 잘못 처리한 분야의 일을 더 유능한 장관에게 맡겨버린다.
그 결과 한때 공보정책용 내무성에 맡기고 육군성으로 하여금 병원을 짓게 하는 혼란이 생기기도 했다.
「파하드」황태자는 부왕 「압둘·아지즈」의 여러 부인중의 하나인「하사·수다이리」를 어머니로 하는 7형제의 맏형이다.
이 형제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서도 권력의 핵심체가 되고 있다.
국방상과 리야드 시장과 내무상등 국가의 안위를 지키는 요직을 모두 이 7형제가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어머니를 가졌다는 혈록으로 뭉쳐 지금도 매주 한번씩 누이 집에 모여 식사를 즐긴다. 그것은 가족들의 회동이기는 하지만 참석자들이 장악한 권력 때문에 실제로는 비공식 정책회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서방기자들은 이들 7형제를「수다이리 7」이라고 부른다.
「파하드」의 맏아들은 청년복지회 회장이고, 둘째 아들「무하마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신전화 시스템을 새것으로 개량하는 수10억 달러 짜리 공사를 맡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가 혈록을 중시하는 것은 사실 이 나라국민에게 공통된 특징이다. 따라서「파하드」황태자가 자기 아들과 형제, 심지어는 매부들에게까지 중책을 맡기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가 곧 용인일수는 없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불평하는 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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