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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한국hp … 고맙다, 중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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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 휴대전화로 토지대장 발급을 신청한 뒤 편의점 프린터에서 받아보는 기술을 한 모델이 시연하고 있다. 한국hp는 벤처 이즈데이타가 개발한 이 기술의 해외 마케팅을 대신해 주고 있다. [제공=한국hp]

2000년 초. 한양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교내 벤처를 차렸던 김인현 한국공간정보통신 사장에게 한국휴렛팩커드(hp.당시 컴팩)의 한 직원이 찾아왔다. 이 회사가 차량용 내비게이션이나 휴대전화 위치확인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지리정보시스템(GIS)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공동 사업 등을 논의하러 온 것이었다.

"기술을 지금 상품화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hp 직원)

"여러 가지 모의 실험(시뮬레이션)을 해봐야 하는데 그러려면 값비싼 수퍼컴퓨터가 필요한데요."(김 사장)

"저희 것을 1년간 무료로 빌려드리지요."(hp 직원)

"공짜로요? 빌리려면 한 해 몇억원을 내야하는 컴퓨터인데…."(김 사장)

"저희 사옥 안에 개발실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hp직원)

한국hp의 지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공간정보통신이 기술을 상용화한 뒤에는 한국hp의 이름으로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초청해 몇 차례 설명회를 가졌다. 비용도 한국hp가 댔다. 김 사장은 "만약 한국공간정보통신의 이름으로 설명회를 개최하고 초청장을 돌렸다면 '뭐 하는 회사냐'며 아무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지금 한국공간정보통신은 잘나가는 벤처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대오토넷 등 민간 업체와 경찰청 등 주요 공공기관들이 이 회사 기술을 쓴다.

한국hp도 함께 돈을 벌었다. 한국공간정보통신이 기술을 납품할 때 한국hp의 장비도 같이 들어간다. 반드시 한국hp의 장비를 써야한다고 계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hp의 컴퓨터를 이용해 개발한 기술이어서 다른 어느 회사 장비보다 hp의 것과 잘 맞아들어가기에 이 회사 컴퓨터를 같이 납품하는 것이 자연스런 결과라고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한국hp와 협력 중기가 모두 이득을 보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경영'이 화두인 시대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와 중소기업 사장을 함께 청와대로 불러 상생 경영을 당부하기도 했다. 중기가 개발한 기술과 제품의 대가를 제대로 쳐 주지 않는 등, 그간 대기업이 중기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했던 관행을 고치자는 취지였다.

외국계 기업인 한국hp는 오래전부터 '상생경영'을 펼쳐오고 있다. 2000년에 컴팩이 만들었고, hp가 컴팩을 합병한 뒤에도 계속해오고 있는 '이-코리아(eKorea)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기술력 있는 중기와 벤처를 찾아 기술을 상품화하도록 장비를 빌려주고, 또 대기업 등을 대상으로 기술 설명회도 열어준다. 현재 300여 벤처가 eKorea 프로그램에 가입해 있다. 이들을 위한 설명회만도 지금까지 300여 차례 열었다.

한국hp에서 eKorea 업무를 담당하는 황지혜 차장은 프로그램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객은 hp의 장비뿐 아니라 자기 회사에 꼭 맞는 소프트웨어(솔루션)도 원한다. 그것을 모두 hp가 개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중기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기는 기술을 팔고, hp는 고객에게 단순 장비가 아닌, 종합 시스템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협력은 한국만이 아니라 hp의 세계적인 경영 전략이다. 중기의 기술이 뛰어나면 hp 본사 차원에서 해외 마케팅까지 해준다. 무선 프린팅 기술을 가진 국내 벤처 이즈데이타는 이런 지원을 받아 싱가포르의 통신회사에 기술을 수출했다. 국내에서는 서울 강남구청 등이 이 회사의 기술을 쓰고 있다. 휴대전화로 민원서류를 신청하면 훼미리마트 등에 설치된 프린터에서 서류가 인쇄돼 나오는 데, 이는 이즈데이타의 기술이다.

이즈데이타 이종희 사장은 "hp라는 브랜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해외 기술 수출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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