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통준위가 키신저를 부를 필요가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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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

얼마 전 동아일보에 ‘통일준비위원회가 버려야 할 것’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이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키신저와 같은 인사를 국제특보단으로 영입하지 말라는 주문 때문이었다.

글을 쓴 김영식 기자는 심장 수술까지 한 90을 넘긴 고령의 키신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의 주문은 상당히 의외였지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의외인 이유는 많은 사람이 지금 키신저를 찾고 있는데 그는 키신저를 부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가 있어 보인 이유는 키신저의 세력균형론이 과연 통일 준비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키신저는 세력균형을 신봉하는 현실주의 전략가다. 힘에 의한 국가 간의 세력균형이 국제질서의 안정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는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진정성이나 도덕적 원칙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조정과 재균형(rebalancing)을 통한 국가 간의 갈등관리와 균형의 유지다.

그는 최신 저서 『세계질서(World Order)』에서 이를 다시 강조하고 있다. 우리 정책 당국자들은 물론 언론이나 학계에서도 관심이 적지 않다. 북핵 문제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에 대한 그의 해박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유럽에서 일어났던 국가 간의 위험한 세력경쟁이 지금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는 이미 20년 전에도 이러한 위험을 예고했다. 그는 『외교』라는 저서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과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시켜 동아시아의 불안정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지역 질서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중·일 간 세력균형이 필요함을 역설한 바 있다.

 그의 지적대로 미·중·일 3국 간의 세력균형이 동북아의 전쟁과 평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냉전시대에는 북·중·소 북방 3각동맹과 한·미·일 남방 3각동맹이 세력균형을 이루며 동아시아의 질서를 유지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한 나라가 패권국가가 되지 못하도록 외교전략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70년대 이후 동북아에서는 미·중·일 3국 간에 대체적인 세력균형이 유지돼 왔다.

 그런데 지금 이 세력균형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우리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과 너무 밀착하면 우리의 선택지가 거의 없어진다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이냐 중국이냐 하는 이런 세력균형적 시각은 문제가 적지 않다.

  물론 국제관계에서 안보동맹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동북아에서는 경제와 문화, 정보통신의 비중이 정치·군사적 비중보다 더 커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냉전이 어떻게 종식되었는가를 한번 되돌아 보자. 세계 경제가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에 미친 영향이나, 인권을 존중하는 75년의 헬싱키 선언이 동유럽의 민주화에 미친 영향을 빼놓고 냉전의 종식을 논할 수 있겠는가. 국가를 초월한 이런 경제와 문화, 정보의 흐름이 냉전을 종식시키는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힘에 의한 균형만 강조하던 현실주의자들은 어느 누구도 이런 냉전의 종언을 예상할 수 없었다.

  지금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은 달라지고 있다. 또 우리 대한민국의 역량도 달라졌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우리의 역량이 지금처럼 커진 적은 없다”고. 그래서 “더 이상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라는 패배의식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식과 역량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남북관계에 관한 한 이런 변화된 인식, 높아진 역량은 아직 현실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

 돈과 사람, 정보의 움직임은 멈출 수 없다. 국가를 초월한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북한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다.

이 때문에 지난 13일 통준위 2차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밝힌 5·24조치 해제 검토와 북한과의 대화 의지 천명이 통일대박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구두(口頭) 다짐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북한과 이런 움직임의 공유면적을 넓히는 정책으로 현실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 키신저 식의 세력균형적 시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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