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 가족들 '눈물의 미아리고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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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 가족 100여 명이 21일 서울 미아리 고개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가는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이충형 기자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21일 오후 서울 미아리고개를 넘던 유종근(71)씨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불렀다. 통역관으로 일하다 1950년 북한으로 끌려간 형 계식(1922~? )씨를 그리워하는 노래였다. 서대문에서 미아리까지 맨발로 걸어온 유씨는 "노랫말처럼 형님은 철사줄로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전쟁(1950~53년) 중 강제 납북된 인사들의 이산가족 100여 명이 이날 오전 서울 현저동 서대문형무소 터에 모였다. 남북 당국에 납북인사들의 생사 확인을 촉구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들은 서대문에서 종로~대학로~미아리고개~우이동을 거쳐 강원도 철원군의 옛 노동당사까지 가족들의 납북 상황을 재현했다. 서대문~우이동 40리(16㎞) 구간에선 직접 걸어가면서 납북자들의 '고행'을 체험했다.

납북 재현 행렬이 시작되자 인민군 복장을 한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은 "동무, 줄 딱딱 맞추라우…"라며 남겨진 가족들을 포승줄로 묶은 채 길을 재촉했다. 가족들은 '납북인사 생사확인''헤어진 지 55년, 이별이 너무 길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뒤따랐다.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던 남편이 결혼 1년 만에 납북됐다는 김항태(76) 할머니는 "다락에 숨어 있던 남편을 인민군들이 끌고 갔다"고 하소연했다.

납북 인사들을 집단 수용했던 곳으로 알려진 현재의 종로타워(옛 화신백화점 자리) 앞에 이르자 변호사였던 아버지(1909~?)를 둔 이성의(57)씨는 "저곳에서 아버지가 고초를 당했을 것을 떠올리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며 두 눈을 감았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참가자들은 잡곡밥에 소금을 치고 김 조각을 넣은 주먹밥을 꺼냈다. 납북자들은 북으로 끌려가던 길에 이 주먹밥 1~2개로 하루 세 끼를 버텼다고 한다. 일부는 55년 전 납북 가족의 고통을 떠올리며 선 채로 먹었다. 이날 밤 우이동 솔밭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버스로 옛 노동당사로 이동했다.

22일 오전 옛 노동당사 건물에 모인 납북자 가족들은 북녘 땅을 향해 가족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이상일(56)씨는 낡은 사진 한 장을 매만졌다. 50년 9월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옛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납북된 이씨의 부친 이봉우(1924~?)씨였다. 이씨는 "홀어머니가 삯바느질과 식모살이를 해가며 저를 키웠습니다. 아버지, 어디 계십니까"라며 울먹였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자 수는 8만2959명. 미 국무부의 기밀문서에 따르면 50년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서울에서만 1만~2만여 명이 학살되거나 북으로 끌려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2002년 9월 남북한은 납북자를'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로 분류해 생사 확인에 들어가기로 합의했으나 현재까지 진척이 없는 상태다.

철원=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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