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 몰래 뽑아가고 화분은 통째 슬쩍 … 도로변 화단 꽃도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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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밤 시간대에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의 새마을금고 앞에 있던 화분을 들고가고 있다. 화분을든 채 유유히 사라지는 이들의 뒷모습은 새마을금고 폐쇄회로TV(CCTV)에 포착됐다.

‘꽃을 뽑아가지 마세요.’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의 한 대형화분에 있는 나무푯말 문구다. 푯말 옆에는 ‘꽃을 캐가지 마시오. 절도입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적힌 A4 용지도 붙어 있다. 화단 앞 열쇠가게를 운영하는 최병민(56)씨가 붙여놓은 것들이다. 최씨는 “구청에서 꽃을 심어놓으면 며칠도 되지 않아 누군가 뽑아간다. 두 달 전 나무푯말을 붙였는데 그래도 계속 뽑아가서 종이까지 붙였다”고 했다.

 서대문구청은 연세로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면서 대형화분 260여 개를 길가에 설치하고 꽃들을 심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서울, 꽃으로 피다’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꽃을 뽑아가는 도둑 때문에 일주일 간격으로 화분을 재정비하고 있다. 서대문구청은 지난 6일부터 3일간 연세로 모든 화분에 꽃 5525본을 새로 심었다. 꽃도둑은 꽃을 심는 사흘 내내 나타났다. 김남중(61) 서대문구청 공공근로단장은 "둘째 날 와보니 첫째 날 심은 꽃 몇 본이 감쪽같이 없어져 새로 심었다. 셋째 날에는 둘째 날 심은 꽃은 물론 다시 채워넣은 꽃들도 뽑아갔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기자가 연세로를 돌며 화분들을 살펴봤다. 꽃이 뽑혀나간 흔적을 20개 이상 찾을 수 있었다. 작은 원형의 구덩이가 화분 곳곳에 파여 있었다. 한 화분은 꽃 등 화초 10여 본이 전부 사라져 흙만 깔려 있었다. 구청은 14일 250여 본의 화초 모종을 들고 나와 재정비에 나섰다. 서대문구청 관계자는 “꽃을 뽑아가고 훼손하는 바람에 일주일마다 정비를 해야 한다”며 “처음 세운 예산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13일 꽃이 전부 뽑혀 화분이 비어 있다.(왼쪽) 구청은 다음 날 다시 꽃을 채워넣었다. [강정현 기자]

 23일 오전 10시쯤 화분에서 꽃을 뽑고 있는 60대 여성을 만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레 보라색 꽃을 뿌리째 뽑아 종이봉투에 담았다. 기자가 쫓아가 “왜 꽃을 뽑았느냐”고 묻자 “집에 가져다가 심으려고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꽃을 사랑하니까… 옛말에 꽃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고 그랬어.”

 꽃도둑은 연세로에 있는 새마을금고 앞에도 다녀갔다. 입구에 진열해 둔 화분이 사라진 것이다. 한 여성이 늦은 밤 화분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이 매번 폐쇄회로TV(CCTV)에 포착됐지만 제자리에 돌려놓은 적은 지난해 8월뿐이다.

 서대문구청은 인근 상점과 노점 주인들이 화분을 한두 개씩 책임지는 ‘꽃 돌보미 지정제’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꽃 절도는 주로 심야시간대에 벌어진다. 노점 주인 박춘심(65)씨는 “다음 날 와서 또 뽑아갔는지, 무사한지를 확인만 할 뿐”이라며 “꽃 때문에 보초를 세워둘 수도 없고 이건 상식의 문제 아니냐”고 소리를 높였다. 서울시청 이원영 조경과장은 “연세로뿐 아니라 주택가 골목길 등 지자체가 조성한 화단에서 꽃을 뽑아가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지역 주민들이 자체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있지만 몰래 뽑아가는 경우는 손 쓸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꽃을 통해 마음과 마음 사이에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곤 한다. 함께 보기 위해 심은 꽃들을 훔쳐 자신의 집에 놓거나 선물을 한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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