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석유「중독」덕보는 사우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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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산유국들이 석유공급 과잉으로 감산이냐 유가인하냐, 이 두 가지 문제를 놓고 진통을 겪고 있다. 석유 무기화시대는 서서히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산유국들은 아직도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 시리즈는 영국의 베스트셀러 저술가 「로버트·래시」가 4년 동안 최대 산유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살면서 왕가의 왕자들과 정부 각료를 비롯, 수백명과 인터뷰를 하며 산유국가들에 관해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쓴 글을 간추린 것이다. 필자는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선데이 타임즈지 기자로 일했었다. <런던=장두성특파원>
76년 빈의 OPEC 일부가 국제 테러범 「카를로스」일당에 의해 점거됐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상 「야마니」도 다른 나라 석유상들과 함께 인질이 됐었다.
그때 「카를로스」는 「야마니」에게 다가와 권총을 겨누면서 그를 서구의 괴뢰라고 불렀다. 그는 이어 『총격전이 시작되면 네놈이 제일먼저 죽을 줄 알아라』고 위협했다.
이 위기에서 무사히 풀려난 「야마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아무래도 횡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하지만 문제없습니다. 나는 우리국민과 신의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가 대변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정책은 소비자인 서구와 국내 소장파로부터 다같이 비난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OPEC의 다른 회원국가와 아랍 정치의 과격파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우디아라비아 지도자들은 73년의 오일쇼크이래 『공급을 반으로 줄이면 가격이 배로 뛴다』는 원론적인 시장논리에 정 반대되는 석유 정책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75년에서 81년 사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생산량을 하루 4백만 배럴이나 증가시켰으면서도 가격은 항상 시장 수준 아래로 억제해 온 것이다.
79년 중 한때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가 유럽의 현물시장 가격보다 배럴당 10∼12달러나 싼 적도 있었다. 그리고 OPEC 회의 때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가격 인상을 요구하는 다른 회원국에 대해 「증산」을 무기로 반대해왔다.
그렇다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정책을 설명할 수 있는 자체의 논리는 무엇일까?
분석가들이 산유국의 석유생산 정책을 규정할 때는 으례 정치적 용어를 쓴다. 알제리는 반 서방 과격파로서, 석유 값을 올리려 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친 서방 보수파여서 항상 석유값 급등을 억제하려한다는 등의 해석을 한다.
그러나 산유국의 매장량을 살펴보면 그런 각자의 행동은 정치보다는 눈앞의 실리에서 연유됨을 알 수 있다.
알제리는 10년 정도, 길어야 15년 정도면 석유자원이 바닥난다. 그러니까 석유 값이 10년 후에야 어찌되든 관심 없다. 우선 최고의 값을 받아내는 게 급선무다. 석유 값이 너무 비싸서 세계가 대체 에너지로 전환한들 알 바 아니다. 어차피 그때가면 알제리는 이미 산유국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최소한 50년은 버틸만한 매장량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세계가 계속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쓰게 하는 것이 이익이다. 50년대와 60년대에 석유 값이 너무 싸서 산유국이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 대신 온 세계가 다른 에너지원을 등한히 하고 석유에「중독」되게 만들었다. 그 덕을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 톡톡히 보고있는 것이다.
1859년에 시작된 석유시대는 l백22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만한 후계 에너지가 나서지 않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말에 시작된 대체에너지 개발노력과 소비억제 노력이 하나의 중요한 추세가 된다면, 예컨대 2001년쯤이면 세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일한 수입원인 석유에 의존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73년까지 세계의 석유 소비는 매년, 7∼8%씩 증가했다. 그러나 73년 이후에는 증가율이 1.5%로 둔화되었고 79년 이후에는 반전해서 전 세계적으로 4.7%가 감소했다.
이런 추세에 50년을 내다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석유란 지하호수처럼 괴어있는 것이 아니고 스펀지 같은 바위 속에 스며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성에 따라 매장량은 불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 값이 올라감에 따라 「파낼 수 있는」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매장량은 같은 비례로 불어난다.
매일 1천만 배럴의 석유를 파면 그보다 더 많은 양의 매장량이 새로 발견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추세였다.
지난 20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3백억 배럴의 석유를 퍼내 세계에 팔았지만 현재 매장량은 20년 전보다 3배나 더 많아졌다.
1960년의 매장량이 5백30억 배럴이었던 것이 지금은 1천6백50억 배럴이 되고 있다. 부익부도 지나칠 정도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는 47개의 유전이 있지만 이중 15개에서만 석유를 퍼 올리고 있고 나머지 32개는 앞날을 위해 뚜껑이 덮여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최대의 유전인 과와르 하나 만으로도 미국 전체유전의 매장량을 능가한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의 사우디아라비아는 가난한 유목민 집단의 나라였다. 1년에 1백만파운드 정도 되는 메카 순례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수입과 페르시아 만에서 나오는 천연 진주가 외화수입의 거의 전부를 이루었다. 그러나 1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순례자 수가 줄어들고 폐르시아당의 진주는 일본의 진주양식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l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30만 파운드의 빚을 지게되었다. 이때 당시의 왕 「압둘·아지즈」는 영국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1백만 파운드를 준다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어떤 채굴권도 다 주겠다』
이런 곤궁 속에서 제일먼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 가능성에 도박을 건 회사는 미국의 소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미국과 영국은 다같이 매장 가능성이 적다고 믿었기 때문에 간단한 협상 끝에 소칼은 33년 5월9일, 3만5천파운드(7만달러)를 주고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로부터 석유 탐사권을 획득했다.
왕은 우선 급한 김에 탐사권을 양도했지만 석유가 발견될 가능성을 그 자신도 과소평가 했기 때문에 가끔 탐사현장에 나타나서 『쓸데없는 것 말고 우물이나 파 달라고 했다. 소칼의 미국 기술자들은 이에 따라 탐사 작업 틈틈이 왕에게 여러 개의 우물을 파 선사했다.
그러나 기술자들은 그 때 이미 생산을 시작한 바레인의 유전에서 발견된 지층과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지방에서 발견된 지층이 똑같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레인에 석유가 있으며 여기도 틀림없이 석유가 있다』고 믿고 탐사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탐사작업을 시작한지 5년만인 38년3월20일에 드디어 기름을 발견했다. 이것이 제7유전이다.
이때부터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의 경제 패턴까지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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