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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성장률 회복이 시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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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종수
김종수 기자 중앙일보 부장
[일러스트=강일구]
김종수
논설위원

세상에는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입밖에 꺼내기조차 어려운 말이 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흡사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불길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자아내는 말이다. 경제에도 그런 말이 있다. 바로 ‘디플레이션(deflation)’이 그것이다. 오죽하면 디플레이션이란 말을 직접 거론하지 못하고 약자로 그냥 ‘D’라고 표기하는 관행까지 생겼을까. 디플레이션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D의 공포’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디플레이션은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물가도 떨어지는 경제현상을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년 정도 물가하락이 계속돼 경기가 침체되는 상태’로 정의한다. 경기하강과 물가하락이 겹쳤다고 뭐가 그렇게 두려울까 싶지만, 디플레이션이 본격화되면 경제 전체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점에서 정책당국자와 경제주체들이 겁을 먹기에 충분하다.

 디플레이션이 가장 심각한 형태로 벌어진 것이 바로 1929년 미국의 경제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었다.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를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대공황의 참상은 1970년대의 오일 쇼크나 1990년대의 외환위기, 2000년대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적 타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공황은 공급과잉과 유효수요 부족에 통화공급 부족이 겹쳐 일어난 최악의 디플레이션이었다. 공교롭게도 최악의 디플레인 공황(depression) 역시 알파벳 ‘D’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D의 공포’를 증폭시키는 데 한 몫을 했을 것 같다.

 바로 그 ‘D의 공포’가 지금 전 세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역내 국가들의 재정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유로존의 디플레 조짐은 이제 여타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유로존의 지난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3%로 5년 만에 최저수준으로 떨어졌고, 이탈리아와 스웨덴은 소비자물가가 마이너스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추고 은행들에 저리자금 공급을 늘리는 대책을 발표했으나 디플레의 암운은 걷히지 않고 있다.

 아베노믹스를 앞세워 대규모 양적완화에 나선 일본도 지난 4월 소비세 인상 이후 경기부진과 함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다시 1% 아래로 내려갈 위기에 처했다. 그나마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던 미국도 글로벌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회복세가 약화되면서 지난 8월부터 소비자물가가 전달보다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며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중국도 성장세가 꺾이면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중국의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8%에 그쳐 5년래 최저치를 기록했고, 생산자물가는 1.8%가 떨어져 31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경기침체와 물가하락세가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요즘 국제적인 주가하락과 국채수익률 하락의 배후에는 바로 ‘D의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엔화와 유로화의 약세가 일본과 유로존이 자국의 디플레이션 압력을 해외로 이전시킨 징후라는 지적도 나온다. ‘D의 공포’가 스스로 전염력을 가지고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성장이 정체된 가운데 물가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자물가는 지난 2012년 말 이래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동기 대비) 또한 한국은행의 목표범위(2~3%)를 훨씬 밑도는 1% 안팎에 그쳤고, 급기야 9월에는 소비자물가가 전달보다 0.1% 떨어졌다. 전형적인 디플레이션의 조짐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경상성장률이다. 경상성장률이란 실질경제성장률에 물가상승률(GDP 디플레이터 기준)을 합친 개념이다. 즉 물가상승분을 감안해 현재의 화폐가치로 평가한 경제 규모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우리나라의 경상성장률은 2011년 이후 3~5%를 오가며 한 번도 6%를 넘은 적이 없다. 실물경제의 성장이 갈수록 둔화되는 가운데 물가상승률마저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경상성장률이야말로 체감경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다. 기업이 실제로 벌어들이는 영업이익과 가계가 손에 쥐는 소득은 경상가격으로 표시되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경상성장률이 떨어진다는 것은 실물생산의 증가와 물가상승이 모두 둔화되거나 줄어들었다는 뜻이고, 피부로 느끼는 체감경기가 그만큼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경상성장률 하락의 요인을 굳이 따지자면 실질성장률의 하락보다 물가상승률의 하락이 더 큰 몫을 차지한다.

 결국 체감경기를 살리자면 경상성장률을 일정 수준(예컨대 6%) 이상으로 높여야 하는데, 실질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데는 시간이 걸리므로 단기적으로는 물가상승률을 회복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디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라도 물가를 다소 올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금리인하나 부동산 경기 활성화 등 단기 부양책들이 그것이다. 일각에선 이 같은 단기부양책의 부작용을 이유로 경기부양에 난색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D의 공포’가 눈앞에 다가온 마당에 단기부양책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아무리 급한 중환자도 일단 응급처치는 해야 하고 수술받을 만한 체력은 회복시켜야 할 것 아닌가.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