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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지금 취소 땐 득보다 실 많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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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노무현 대통령이 14일 김원기 국회의장 등 3부 요인 및 5당 대표와 함께 청와대 오찬 회담장에 들어서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지난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한.일 정상회담 등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김춘식 기자

한.일 정상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20일 열리게 됐다.

양국은 한 달 전부터 정상회담 일정과 회담 의제를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여왔다.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지난 1일 신풍호 해상 대치 사건을 외교적으로 해결한 뒤 회담 개최가 사실상 확정됐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도 "정상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것"이라고 수차례 공언해 왔다.

이후 양국 외교실무진은 ▶독도 영유권▶교과서 등 과거사 문제▶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 양국 간 3대 현안을 놓고 조율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일본 측이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아 최근엔 협상이 답보 상태에 빠져 있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는 상황에서 양국 정상이 웃으며 악수만 할 수는 없지 않으냐"며 고충을 토로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일본 정부는 ▶일제시대 때 강제 징용된 한국인의 유골 반환▶사할린 거주 한인 지원▶북관대첩비 반환 등 여러 가지 '당근'을 내놨다. 하지만 우리의 요구 수준과는 너무 차이가 컸다. 더욱이 핵심 현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에선 강경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정상회담을 뭣 하러 하느냐" "괜히 만났다가 성과가 없으면 여론만 악화될 것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고민도 깊어갔다. 국내 여론에 비치는 한.일 정상회담은 한.미 정상회담과는 전혀 달랐다. 한.미 간에는 '동맹'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지만, 한.일 관계의 밑자락에는 미묘한 자존심 대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적으로 고전하고 있는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일본에 질 수 없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을 법하다.

결국 노 대통령이 "지금 와서 취소하면 득보다 오히려 실이 많다"는 현실론을 받아들였다고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전했다. 특히 우이(吳儀)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지난달 23일 회담 반나절 전에 고이즈미 총리와의 면담을 전격 취소한 뒤 일본 내에 반중 감정이 급증한 사실을 들면서 "여기서 한국마저 일본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모든 덤터기를 우리가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논리에 노 대통령이 최종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좋아지리라고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일본은 이번 회담으로 양국 관계가 정상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일부 관리들은 북핵 공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도 국내 사정상 양보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하라는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전직 총리 8명이 한목소리로 참배 중단을 촉구했고,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참배에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만큼 독도나 교과서 문제에서 한국에 섣불리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단호하다. 한 당국자는 "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부터 일관되게 일본의 성의 있는 자세를 촉구해왔지만, 아직 답이 하나도 없다"며 "열쇠는 일본이 쥐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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